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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주장: "성령세례(충만)를 받아야만 변화된 생활을 할 수 있다."

롬 1:11-12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NIV   I long to see you so that I may impart to you some spiritual gift to make you strong-that is, that you and I may be mutually encouraged by each other's faith.

엡 3:16-21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엡 3:16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NIV   I pray that out of his glorious riches he may strengthen you with power through his Spirit in your inner being.
KJV   That he would grant you, according to the riches of his glory, to be strengthened with might by his Spirit in the inner man.
 
    롬 1:11-12에 나오는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라는 기록에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spiritual gift)를 받아야 견고케 된다”고 하였다. 바울은 행 19:1-7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뒤 예수 이름으로 물세례를 베풀어 신약시대의 기독교인이 되게 한 후에 그들에게 안수하여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서 예언과 방언의 은사를 받게 했다는 말은 성령세례(충만)를 받게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도 이러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곧 성령세례(충만)를 받게 하여 그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로마에 가려고 했음을 밝히고 있다. 오순절 전의 제자들은 나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으나 오순절 날 성령세례(충만)를 받고서야 흔들리지 아니하는 견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는 예수님 재림시까지 적용되어야 할 기본적인 원리이며 원칙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많은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불교로 간다고 하는데, 이는 성령세례를 통하여 견고한 믿음을 갖게 해주지 못함으로 생긴 당연한 결과이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변화된 새 사람이 될 수가 없고 절대로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엡 3:16에 나오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는 전혀 그릇된 번역이다. 바른 번역은 “너희 안에, 또는 너희 속에 거하시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너희를 강건하게 하옵시며”이어야 한다. 바른 해석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성령의 능력(또는 권능)으로 너희를 강건하게 하옵시며”이어야 한다. 엡 3:16의 "너희 속 사람"의 그릇된 번역으로 인하여 사람이란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렇게 구분해서는 안 된다.  성령의 능력(권능)은 오직 성령세례(충만)만을 통하여 얻어지는 것이다. 성령세례를 통하여 능력(권능)을 받지 아니하면 절대로 강건해질 수 없다. 오순절 전의 베드로를 위시하여 열두 제자들은 밤과 낮으로 3년 동안 예수님을 직접 따라 다니면서 모든 교육을 받았고, 직접 병자를 고치기도 했으며, 수많은 기적을 체험했고, 부활을 직접 목격했지만 과거의 물고기 잡이의 직업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이와 같이 한없이 나약한 상태에 있었지만 오순절 날 성령세례(충만)를 통해 성령의 권능을 받고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고,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권능 있는 복음을 전파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큰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건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접해보면 한없이 나약한 신앙 상태에 머물러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중생한 후에 성령세례(충만)를 통해 성령의 권능을 받지 못하여 견고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엡 3:16-21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기를 간구하고 있다. 예수님 안에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강건하고 견고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충만) 곧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만이 가능하다.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바울의 변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체험한 사람들에 의해서만이 사도행전 사건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어찌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가 어떻게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바울로 변했습니까.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가다가 바울아 바울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여러분이 그 음성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나를 믿지 않고 교회를 다니느냐. 어떻게 그렇게 교회를 왔다 갔다 하느냐. 이런 음성을 여러분이 들어야 합니다. 무덤에 갇힌 예수가 아니라 지금 살아 계셔서 지금 역사하시고 말씀하신 예수를 만날 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합니다. (하용조 목사, ‘사도행전 강해’ 2007년 5월 12일 온누리교회 CGN TV 인터넷에서 발췌)

 

    위에서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바울이 주님의 종으로 변화된 이유에 대하여 “그것은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라는 주장은 일부분은 맞지만 전반적으로는 그릇된 것이다. 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바울로 변하게 된 것은 첫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며, 둘째로 예수님의 역사로 인하여 봉사가 되었다가 3일 후에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은 것이다. 이와 같은 단계를 거쳐서 바울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변화된 것이다. 또한 하용조 목사는 “이런 음성을 여러분이 들어야 합니다. 무덤에 갇힌 예수가 아니라 지금 살아 계셔서 지금 역사하시고 말씀하신 예수를 만날 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합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우리가 오늘날 어떻게 바울처럼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 바울처럼 어떻게 직접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용조 목사의 주장대로 말한다면 바울처럼 예수를 만나 뵙고 바울처럼 직접 음성을 듣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변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이는 언어도단이다. 베드로는 3년 동안 예수님과 기거를 같이 했고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그는 과거의 물고기 잡이였던 어부의 직업으로 되돌아 갔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지만 그의 신앙생활은 전혀 변화되지 아니하였다. 하용조 목사가 말하는 “예수를 만날 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합니다”라는 주장은 베드로에게 전혀 적용되지 아니하였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에게 “예수를 만날 때부터 우리의 신앙은 변합니다”라는 말은 결코 적용될 수 없다.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세례(충만)를 받고서야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또한 사도 바울도 성령세례(충만)를 받고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이들과 똑같이 우리도 성령세례(충만)를 받아야만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변할 수 있다.
    하용조 목사를 위시하여 오늘날 한국과 전 세계의 신학계와 교계에서 성령세례(충만)의 뜻도 제대로 연구되어 있지 않고 있으며, 성령세례(충만) 받는 방법은 아예 모르고 있다. 따라서 큰 교회이건 작은 교회이건 목사이건 선교사이건 장로나 권사나 평신도이건 오순절 전의 베드로처럼 변화된 견고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음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다. 중생한 후에 성령세례(충만)를 받지 않고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절대로 변화될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김세윤 목사가 말하는 바울의 변화
바울이 다메섹 쪽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그 만남에서 바울은 복음을 받았고 또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즉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사도가 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았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김세윤 목사, ‘예수와 바울’ 2001, p.352)

 

    이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주장은 김세윤 목사가 성경을 제대로 한번 읽지 않고 추측에 의한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3일 동안 눈먼 봉사로 있으면서 금식기도 후에 주님이 보내신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눈을 뜨게 되었고 동시에 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물로 세례를 받은 뒤에 식사를 하고 건강을 회복한 후에 즉시 다메섹에 있는 여러 회당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였다(행 9:3-22). 여러 날이 지나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거하므로 그를 죽이려 하므로 광주리를 타고 도망하여(행 9:23-25) 다메섹을 벗어난 바울은 자기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다(갈 1:17).
    바울이 아라비아에 얼마동안 있었다는 기록과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는 성경의 기록은 일체 없다. 따라서 김세윤 목사가 말하는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다”는 기록은 성경에 그 근거가 일체 없는 것을 자의적으로 그릇 주장한 것이다. 또한 김세윤 목사가 주장하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기록이 없다. 행 9:15에 바울을 찾아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그에게 가기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는 아나니아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뿐 주님께서 바울에게 직접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령하시지 아니하셨다. 그가 다메섹을 탈출하여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후에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으로 갔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사귀고자 하였으나 모두 그를 회피함으로 바나바가 그를 사도들에게 안내하여 그들과 함께 사귀게 되었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증거하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다(행 9:26-29).


    바울이 행 9장에서 예수님을 맞나 뵙는데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행 22:16-21에서 하기를 “아나니아가 말하기를 ‘이제는 왜 주저 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하더라.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하시거늘,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저희도 아나이다. 나더러 또 이르시되 ‘떠나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떠나 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은 명령의 말씀이다. 이 명령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과 같은 의미이다. 행 9:29-30에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환상 가운데서 만나 뵙고 그 후 3일 후에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성령충만)을 받고 곧 이어서 물세례를 받은 후 식사를 하여 건강을 회복한 즉시 다메섹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시작했다. 이와 같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므로 이때 유대인들이 그를 죽으려 하므로 다메섹을 탈출하여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중에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으려 하므로 예수님께서 이때에서야 비로소 바울에게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이다.


    이상의 기록은 김세윤 목사가 “그 만남에서 바울은 복음을 받았고 또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즉 이방인들을 위한 그의 사도가 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았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다”라는 주장은 황당한 것임을 증명한다. 김세윤 목사는 이러한 황당한 그릇된 연구를 하여 낸 책이 바로 “예수와 바울”이라는 저서인데, 책의 뒷 표지에서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라고 스스로 극찬을 하고 있다. 바울을 엉터리로 연구한 김세윤 목사가 미국의 풀러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한국 목사들을 위한 박사원의 원장으로 있으며 수백 명의 한국 목사들이 그에게 배우고 그에게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가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비극 중의 비극이다. 사도행전 9장과 22장과 갈라디아 1장에 기록된 바울을 바로 연구하지 아니하고 가르치는 가르침은 전부 그릇된 것이다. 사도 바울을 연구하려면 바울이 먼저 성령충만(성령세례)을 받고 복음사역에 임했음을 알고 바울과 같이 성령충만(성령세례)을 먼저 받아야 한다.
    김세윤 목사의 500쪽에 달하는 저서인 “예수와 바울”에 의하면 “바울이 성령충만을 받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그는 성령세례(충만)의 뜻도 모르고 있음을 그의 저서가 밝히고 있다. 또한 그의 저서에는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는가를 간략하게 분명히 밝히는 고전 2:1-5의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의 기록은 손도 대지 아니하였다. 또한 그는 바울이 왜 로마에 가기를 심히 원했는가를 밝히는 롬 1:11-12의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손도대지 아니하였다. 바울의 복음전도의 핵심구절인 롬 15:18-19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 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 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라는 기록은 전혀 손도 대지 아니했다. 행 9:17-18에 기록된 바울이 받은 성령충만과 롬 1:11-12, 롬 15:18-19, 고전 2:1-5를 전혀 손도 대지 아니하고 전혀 연구하지 아니한 김세윤 목사의 책은 엉터리 저서라는 사실이 그의 책을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엉터리 책을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신학자”가 쓴 책이라는 말에 현혹 되고 소위 유명한 신학교의 교수라는 직함에 현혹되어 그의 책을 성경진리를 밝히고 있는 책으로 믿고 착각 속에서 그에게서 박사학위를 받는 목사들이나 전도사들은 분명히 불행의 주인공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