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신학자들이 말하는 세례의 요소(수단, 도구)

John R. W. Stott가 말하는 세례의 요소(수단, 도구)

성령은 하나님이시다(The Holy Spirit is God). 성령의 부으심과 성령의 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는 새로운 시대의 주요한 특정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세례 요한의 사역의 특징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고(to baptize with water), 예수님의 사역의 특징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었다(to baptize with the Holy Spirit). 120명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였고 약 10여일간 기다린 후에 성령의 세례(the baptism of the Spirit)를 받았다. 물세례는 죄의 용서함을 가져오는 성령세례의 외적 표적이며 확증이다. 성령세례(Spirit-baptism)는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경험이기 때문에 물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의식이다. 
능동태(active)로 기록된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였고, 수동태(passive)로 기록된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서 예수님이라는 말이 생략 된 것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는 예수님이어야 한다. 만약에 고전 12:13에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가 성령이라고 한다면 그가 베푸는 세례의 요소(element)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세례는 반드시 요소가 요구되며 이 요소가 없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다. 따라서 고전 12:13의 세례에서의 요소는 반드시 성령(the Holy Spirit)이어야 하고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자(the baptizer)이어야 한다.(John R. W. Stott, ‘Baptism & Fullness-the work of the Holy Spirit Today’ p.22,23,28,42-43)
   
    John Stott는 이상에서 “성령은 하나님이시다”(The Holy Spirit is God)라고 주장하면서 “성령으로 세례”(to baptize with the Holy Spirit)라고 하여 성령 하나님을 물(water)과 같이 물질취급하고 있는데 이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는 처사이다. “고전 12:13에서의 세례는 반드시 요소가 요구되며 이 요소가 없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다. 따라서 고전 12:13 의 세례에서의 요소는 반드시 성령(the Holy Spirit)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물로 세례”(water-baptism, baptism with water)라는 용어는 존재할 수 있어도 “성령으로 세례”(Spirit-baptism, baptism with the Spirit)라는 용어는 절대로 존재 할 수 없다. 따라서 ‘baptize with the Holy Spirit’와 ‘Spirit-baptism’은 그릇된 용어이므로 바른 용어는 반드시 ‘baptize with/in the fire of the Holy Spirit’ 또는 ‘the Holy Spirit’s fire baptism, 또는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이어야 하며, ‘water baptism’의 경우 물이 요소(element)이지만 ‘the Holy Spirit’s fire baptism’의 경우에는 반드시 불(fire)이 요소(element)이어야 한다. 따라서 세례에서의 요소는 반드시 성령(the Holy Spirit)이어야 한다는 John Stott의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마 3:11과 눅 3:16에 기록된 ‘불’(fire)이 막 1:8,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 13에는 나오지 아니하는데, 여기에서는 반드시 ‘불’(fire)이 생략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만약에 이렇게 해석하지 아니하면 성령 하나님이 물과 같이 물질취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현대의 전 신학계에서 모든 신학자들이 일체의 예외 없이 성령(님)을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모순 때문에 성령론을 정립하는데 실패하게 된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 없이 성령(님)을 성령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면 성령론의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John Stott의 성령세례를 베푸는 요소의 주장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면 다음과 같다.

"능동태(active)로 기록된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였고, 수동태(passive)로 기록된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서 예수님이라는 말이 생략 된 것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는 예수님이어야 한다. 만약에 고전 12:13에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가 성령이라고 한다면 그가 베푸는 세례의 요소(element)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세례는 반드시 요소가 요구되며 이 요소가 없는 세례는 세례가 아니다. 따라서 고전 12:13의 세례의 요소는 반드시 성령(the Holy Spirit)이어야 하고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시는 자(the baptizer)이어야 한다"는 John Stott의 주장의 문제점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능동태(active)로 기록된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였고, 수동태(passive)로 기록된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서 예수님이라는 말이 생략 된 것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는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바른 주장이다.

2) 그러나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서 예수님이라는 말이 생략 된 것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는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마 3:11, 눅 3:16, 막 1:8, 요 1:33을 인용하여 세례를 베푸시는 이는 예수님이라고 하였다면,

3) 마 3:11과 눅 3:16에 나오는 "성령과 불"(the Holy Spirit and fire) 중에서 "불"(fire)은 왜 인용하지 아니했느냐 하는 것이다.

4) 마 3:11과 눅 3:16에 나오는 "불"(fire)이 막 1:8, 요 1:33, 행 1:5, 고전 12:13에서 생략된 것이라는 사실을 John Stott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말대로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서 예수님이라는 말이 생략 된 것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the baptizer)는 예수님이어야 한다"는 주장대로  "마 3:11과 눅 3:16에 나오는 "불"(fire)이 막 1:8, 요 1:33, 행 1:5, 고전 12:13에서 생략되었으므로 고전 12:13에서 세례의 요소는 "성령님의 불 또는 불"이라고 주장했어야 한다. 

5) John Stott의 성령세례의 요소는 "성령"(the Holy Spirit)이라는 주장은 전혀 비성경적인 것이다. 이상의 예에서 보았듯이 그의 성령론은 많은 부분에서 그릇된 연구가 허다하다. 이러한 그릇된 연구를 바른 연구라 믿고 그대로 인용하고 수입하여 가르친 박형룡 목사, 박윤선 목사, 옥한흠 목사는 한국 신학계와 교계를 심히 오도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현대의 한국기독교에서 장로교합동측의 영향력은 지대하다. 이러한 영향력의 배후에는 박형룡 목사, 박윤선 목사가 말하는 성령론이다. 이들은 John Stott의 그릇된 성령론을 비판 없이 성경적인 성령론으로 그대로 수용하여 오도하고 있는데, 이들의 후계자들임을 자처하는 옥한흠 목사, 서철원 목사, 박형용 목사, 최갑종 목사 등의 그릇된 성령론으로 인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계속하여 비 성경적인 방향으로 혼란의 와중에서 방황하고 있다. 성령론의 바른 정립이 없이는 한국의 신학계와 교계는 방향감각을 잃은 철새의 신세를 절대로 면할 길이 없다. 현재 한국의 신학계와 교계에서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교 교수들과 목사들은 한국 교계가 방황하고 있느 이유를 어려가지로 들고 있지만 이들의 주장은 수박 컷핡기 식으로 바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안영복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요소(수단, 도구)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앞으로 오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고하였다(마 3:11; 눅 3:16). 세례 요한은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앞으로 오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막 1:8). 마 3:11, 눅 3:16에서 불이란 성령의 정화사역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실제로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에 그렇게 정화되는 새로운 변화가 이러났기 때문이다. (안영복 목사, ‘성령론’ p.88,103)

 

    안영복 목사의 이상의 “마 3:11, 눅 3:16에서 불이란 성령의 정화사역을 가리킨다고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실제로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에 그렇게 정화되는 새로운 변화가 이러났기 때문이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마 3:11, 눅 3:16에 나 오는 ‘불’이란 성령의 정화사역을 의미하지 않고 행 1:5, 행 1:8, 행 2:3-4에 근거하여 성령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불이다. 안영복 목사는 “세례 요한은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앞으로 오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막 1:8)고 하는데,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는 경우 성령 하나님을 물세례의 물의 경우와 같이 물질취급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막 1:8의 번역과 해석은 반드시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불’(fire)이 생략된 것으로 해야 한다. 

 

최갑종 목사가 말하는 세례의 요소(수단, 도구)
고전 12:13에서 ‘en’은 수단(요소)을 가리키는 전치사로, 즉 성령으로(by or with the Spirit)...바울이 이미 3절과 9절에서 똑같은 전치사구를 수단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도 성령이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의 수단으로 나타나 있기 때문에(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후자의 해석을 지지 한다. (최갑종 목사, ‘바울연구’ 1992, p.35)
신약성경 어느 곳에도 복합명사 형태의 ‘성령세례’라는 말 자체는 단 한 군데도 나타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신약에서 일종의 동사 형태로 즉 ‘성령으로의 세례’(여격 명사로 나타나는 성령과 연결되어 있는 희랍어 전치사 ‘en’은 문법적으로 장소를 지칭하는 ‘안에서’로 번역할 수 있으나 필자는 수단을 지칭하는 ‘성령으로’라는 번역을 선호한다)라는 말로 네 번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한 성령에 의해 한 몸을 위하여 세례를 받게 되어졌고 그리고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한 성령으로 마시게 되어졌다’(희랍어 원문 직역, 고전 12:13). (최갑종 목사, ‘성령과 율법’ 1994, p.160. 고신대 및 대학원 졸업, 미국개혁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프린스톤대학원 졸업, 천안 백석대학교 신약학 교수, 백석대학교 총장) 

 

    최갑종 목사는 이상에서 “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에 나오는 [여격 전치사 + 여격 명사, 성령](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의 경우에는 수단을 지칭하는 ‘성령으로’(with the Holy Spirit) 번역하고, 고전 12:13의 똑같은 [여격 전치사 + 여격 명사, 성령](ἐν πνεύματι ἁγίῳ)의 경우에는 수단을 지칭하지 않고 세례를 베푸는 자(baptizer)인 ‘성령에 의해’(by the Holy Spirit)로 번역하고 있는데” 동일한 문법의 문장을 동일한 번역의 원리로 번역하지 않고 완전히 다르게 번역하여 모순과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 모순과 오류가 생기게 되었느냐 하면 성령(님)을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의 수단으로 잘못 취급하였기 때문이다.
    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에 나오는 ‘en’은 ‘with/in’으로 번역할 수 있으나 ‘by’로의 번역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구절들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베푸시는 분(baptizer)이시기 때문이다. 행 1:5, 행 11:16, 고전 12:13의 경우에 ‘en’은 ‘with/in/by’로 번역해도 문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 신약성경에 7회에 걸쳐 언급된 성령세례의 어느 경우에든지 ‘성령(님)’은 세례의 수단/요소/도구가 절대로 될 수 없고, 마 3:11, 눅 3:16에 나오는 ‘불’이 막 1:8,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에서는 생략된 것이며, 이 ‘불’이 반드시 성령세례의 수단/요소/도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하지 아니하면 성령세례는 절대로 풀리지 아니하며 성령세례가 풀리지 아니하면 성령론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차영배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의 요소(수단, 도구)
고전 12:13의 원어 ‘엔’(en)은 수단으로 해석해야 한다. 세례 요한은 물로써(휘다티) 세례를 주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써(수단) 세례를 주시리라고 확언한다. ‘엔 헤니 (프)뉴마티’는 ‘한 성령 안에서’라고 할 것이 아니라 ‘한 성령으로써’라고 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마 3:11에 ‘엔 휘다티’와 ‘엔(프)뉴마티 하기오’가 서로 쌍벽을 이 루면서 나오는데, 전자를 ‘물 안에서’라 하지 않고 ‘물로써’(수단)라고 번역했다면, 후자도 ‘성령 안에서’라 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써’가 자연스럽게 보인다. 세례 요한의 경우 물이 수단이었다면, 후자의 경우 성령이 수단일 수밖에 없지 않는가?(요 1:33 참조). 이것은 사도행전 1:5의 말씀과도 일치한다. 120명의 신도들은 오순절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 성령의 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어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붓듯, 혹은 물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물붓듯 부어 주심으로 물로 세례를 받는 것처럼 불로써 세례를 받게 되었다(행 2:33; 마 3:11). (차영배 목사, ‘성령론’ p.58,78,160) 

 

    이상에서 차영배 목사는 ‘물세례의 수단은 물이듯이 성령의 세례의 수단은 성령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120명의 신도들은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데, ‘물붓듯 부어 주심으로 물로 세례를 받는 것처럼 불로써 세례를 받게 되었다’라고 하여 여기에서는 성령이 수단이 아니라 불이 수단이라고 하여 앞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은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차영배 목사가 저술한 그의 ‘성령론’은 많은 부분에서 일치된 논리가 아니라 횡설수설한 글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