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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중생과 성령세례와 복음전도
서철원 목사가 말하는 바울의 중생
바울의 개종은 좀 긴 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는 개종과 동시에 사도로 부름 받았으므로 주 예수를 만나고 세례 받기까지의 3일간이 중생 후 성령 받기를 기다리는 기간으로 볼 것이 아니다. 오순절파는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중생하였고 3일후에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성령을 받았으니 중생 후 성령세례 도식이 잘 성립하는 본문으로 삼는다. 신약교회 중 다른 사람들은 예수 믿음과 성령 받음이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데 바울은 주 예수를 만남과 신앙 고백하고 성령 받는 일 사이에 3일간이 개입하기 때문에 중생 혹은 예수 믿은 후 성령세례 받음이 성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3일전에 예수 믿고 그 후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고 세례 받음이 바로 신앙고백이므로 그의 믿음은 예수를 처음 만난 후 세례 받기까지가 예수 믿음에로의 전이 과정이다. (서철원 목사, ‘성령신학’ p.96-97)

 

    이상의 주장 가운데 “중생 후 성령 받기를, 아나니아에 의해 세례 받으며 성령을 받았으니, 바울은 주 예수를 만남과 신앙고백하고 성령 받는 일”이라고 하여 바울의 “성령 받음”에 대하여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행 9장에 바울이 성령을 받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또한 이상의 “바울은 3일전에 예수 믿고 그 후에 세례 받은 것이 아니고 세례 받음이 바로 신앙고백이므로 그의 믿음은 예수를 처음 만난 후 세례 받기까지가 예수 믿음에로의 전이 과정이다”이라는 것은 그릇된 주장이다. 왜 그릇된 주장인가에 대하여서는 아래의 바울의 중생에 대한 Billy Graham의 주장에서 다루겠다.

 

바울의 중생에 대한 Billy Graham의 주장
사도행전 9:1-18에서 바울이 어느 때에 중생했느냐에 대한 답을 찾기는 어렵다. 바울이 언제 중생했는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 행 9:17에 바울은 성령충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례라는 용어는 사용되어 있지 않다. 바울이 다메섹 길에서 중생했다면 그 후의 충만은 제2의 세례가 아니다. 아나니아가 그에게 갈 때까지 바울은 아마 중생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바울은 두 번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Billy Graham, ‘The Holy Spirit’ p.100)

 

    빌리 그래함의 행 9장에 나오는 바울에 대한 해석은 횡설수설하다. 바울이 언제 중생했느냐는 하나님만 아신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행 9:1-19를 자세히 연구하면 바울이 언제 중생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 구절에 의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예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눈먼 봉사가 되었고,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네가 행할 일에 관하여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일체 반항하지 않고 유다의 집에 들어가 3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있었다. 금식기도 중에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계시를 통하여 바울에게 보여 주시었다. 3일간의 금식기도가 끝날 무렵에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찾아가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그에게 보내 주시었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그에게 안수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며 살기 등등했던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인 아나니아에게 일체 반항하지 않고 순수히 그의 말에 순종하여 안수까지 받아 눈을 뜨게 되었고 안수를 통하여 성령충만을 받고 그에게서 물세례까지 받은 것이다. 만약에 그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도 않은 상태에 있었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아나니아의 말과 행동에 일체 반항하지 않고 안수 받아 눈을 뜨고 성령충만을 받고 나아가서 예수 이름으로 물세례까지 받을리 만무하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아나니아를 만나기 직전 3일간의 금식기도 중에 이미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했고, 따라서 이때 이미 중생한 상태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3일간의 금식기도 중에 예수를 메시야로 영접하여 중생한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충만 곧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바울도 베드로와 같이 중생 후에 성령세례를 받았음을 확증한다.

 

구약시대의 중생에 대한 John R. W. Stott와 Merrill F. Unger의 주장
구약시대에 있어서 모든 신자들은 분명히 중생하였다. (John R. W. Stott, op.cit, p.27).
구약시대 성도들은 중생했음이 확실하다. (Merrill F. Unger, ‘The Baptism & Gifts of the Holy Spirit’ p.41)

 

    이상에서 “구약시대의 모든 신자들은 분명히 중생하였다”는 해석은 바른 해석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중생하였고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중생과 구원은 신약시대의 중생과 구원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오실 예수님을 믿으면 중생하여 구원을 얻지만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이시며, 메시야이시며, 구세주로 믿어야만 한다. 문제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신자들의 경우를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면 120명의 예수님의 제자들, 오순절 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은 3,000명의 경우, 바울의 경우, 고넬료의 경우, 에베소의 세례 요한의 12제자들의 경우의 중생의 문제를 해석할 수 없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구약시대의 신자들과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의 전환기에 있던 신자들에게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 전에 그들은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신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전환기에 속한 신자들로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오실 메시야를 믿던 구약시대에 속한 신자들로서 구약시대에 속한 중생과 구원을 얻은 것이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은 3,000명의 경우도 구약시대의 하나님과 오실 메시야를 믿는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오시었다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있던 중에 베드로의 예수님에 관한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음으로 신약시대로 변화된 신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불신자들이 결코 아니었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기 전에 이미 구약시대에 속한 중생과 구원을 얻은 것이다.
    바울의 경우에 그는 구약을 철저하게 믿고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던 유대인이었고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그도 역시 3,000명의 신자들과 같이 이미 오시었다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중에 다메섹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아나니아의 간단한 설교와 그의 안수로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물세례를 받음으로 정식으로 신약시대의 신자가 된 것이다. 즉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음으로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 변화된 신자가 된 것이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예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고난 후에야 신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니다. 즉 바울은 중생 후에 성령세례(충만)를 받은 것이다.
    고넬료의 경우에 그는 불신자였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서야 중생했다고 예외 없이 모든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그는 절대로 불신자가 아니었고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을 잘 믿어 유대교로 개종한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오시어 사역을 하시다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던 차에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을 메시야 구세주로 영접함으로서 신약시대로 전환된 신자가 된 것이다. 에베소에 있던 세례 요한의 12제자들의 경우에도 그들은 중생하지 못하고 있다가 바울의 설교와 물세례로 받고서야 중생하였다고 모든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그릇된 해석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부터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과 오실 메시야 예수님에 관하여 전도하였고 물세례를 베풀었다. 에베소의 12제자들은 사도행전 18:24-25에 근거하여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신자들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베풀던 물세례를 받았음이 확실하다. 그들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전하는 구약의 하나님과 오실 메시야 예수님을 믿고 요한의 회개의 물세례를 받았다면 그들은 바울을 만나기 전에 이미 중생했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을 믿고 바울이 예수 이름으로 베푸는 물세례를 받기 전에 그들은 불신자였다는 해석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중생하고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을 에베소의 12명의 제자들에게 적용하여 그들이 바울을 만나기 전에는 불신자들이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바울은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김의환 목사가 말하는 바울의 복음전도의 시작

행 9:23에 나오는 ‘여러 날은 상당히 많은 기간’을 의미하는 이 말은 바울의 회심부터 예루살렘 방문까지를 말하는데 3년 동안을 가리킨다(갈 1:17-18). (김의환 목사 편집 ‘큰 성경’)

 

김세윤 목사가 말하는 바울의 복음전도의 시작
바울이 다메섹 쪽으로 그리스도인들을 추격하던 중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흔히 경건한 설교자들은 그가 다메섹에서의 체험에 대해 조용히 묵상하고 기도로 이방선교를 준비하기 위해 아라비아로 갔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바울서신에는 그것이 바울의 주목적이 아니었다고 시사해 주는 점들이 많다. 갈라디아서 1장 17절의 아라비아는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메섹 성 밖에서부터 동남쪽으로 펼쳐진 나바태아 왕국을 가리키는데, 그곳으로 간 주목적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세윤 목사, ‘예수와 바울’ 2001, p.352-353)

 

    행 9:17-25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내리니라.


    김의환 목사가 편집한 ‘큰 성경’에 의하면 행 9:23에 나오는 ‘여러 날은 상당히 많은 기간’을 의미하는 이 말은 바울의 회심부터 예루살렘 방문까지의 3년 동안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행 9:17-25를 잘못 읽은 결과에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행 9:17-25의 기록에 의하면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직후 강한 빛에 의하여 눈먼 봉사가 되었고 3일간의 금식기도 후에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눈의 치유를 받아 다시 보게 되었고, 이어서 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충만을 받았고, 곧 이어서 물세례를 받고 그리고 음식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후에, 그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쌔 즉시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한 것이다. 바울이 이와 같이 다메섹에서 ‘며칠 동안 즉 여러 날 동안’ 머무르면서 복음을 전하므로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 하므로 밤에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을 탈출한 것이다. 따라서 행 9:23을 근거로 하여 “여러 날, 상당히 많은 기간은 바울의 회심부터 예루살렘 방문까지의 3년 동안을 가리킨다”(갈 1:17-18)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황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김세윤 목사는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선포하라는 주의 부르심에 즉각 순종하여 아라비아로 가서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곳으로 간 주목적은 바울로 하여금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성경에 그 근거가 일체 없는 것으로 자의적인 주장이다.

 

레마 성경주석이 말하는 바울의 복음전도의 시작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행 9:20). 바울은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여 구원을 체험하자 즉시 각 회당에 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결코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만으로 전도자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의 깊은 영성생활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본격적인 전도자로 활동했던 것이다. (레마 성경주석 ‘사도 행전’ p.262,264)

 

    이상에서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새 즉시로 각 회당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행 9:20) 바울은 회개하고 주님을 받아들여 구원을 체험하자 즉시 각 회당에 다니며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은 바른 주장이다. 그러나 “결코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만으로 전도자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의 깊은 영성생활이 있은 다음에 비로소 본격적인 전도자로 활동했던 것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일체 없다. 바울은 아라비아에 3년간 머물었다는 성경의 근거는 한 구절도 없다.
 
필자의 주장: “바울은 아라비아에 3년간 머물지 아니했었다.”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였는가? 많은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바울은 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기도생활을 한 후에 복음전도를 시작했다고 주장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즉시 복음사역을 시작하였다. 많은 신학자들이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3년간 기도한 후에 복음전도를 시작했다고 그릇 주장하게 된 성경의 근거는 행 9:17-25, 갈 1:13-20이며 이 구절들을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그릇된 것이다.

 

갈 1:13-20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 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이상의 기록에 나오는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쌔”의 구절을 근거로 하여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전에 3년간 아라비아에 가서 기도를 한 후에 복음 사역을 시작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일을 유할 쌔”의 기록에 분명히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고 그 후 삼년만에 예루살렘에 갔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가서 그곳에서 삼년간을 보냈다”는 기록이 절대로 아니다. 어떻게 하여 이 구절을 근거로 하여 바울이 삼년간을 아라비아에서 기도생활 후에 복음사역을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이 주장은 이 구절을 자세히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주장한 것으로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갈 1:15-17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라고 하였다. 다메섹에서 도망나온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바울이 3년간 아라비아에 있었다는 기록은 일체 없다.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후 그는 어디로 갔는가? 이 질문에 답변을 찾으면 바울이 3년간 아라비아에 있었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임이 증명된다. 바울이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온 후 그는 어디로 갔는가? 행 9:26-30에서 이를 자세히 기록 하고 있다.

 

행 9:26-30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갈 1:18-20  그 후 삼년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 쌔,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박형용 목사는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개종 후 삼년만이었다”(박형용 목사, ‘사도행전 주해’ p.171)고 주장하는데, 이는 행 9:16-25, 행 9:26-30, 갈 1:18-20를 자세히 읽어보지 않는데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행 9:16-25, 행 9:26-30, 갈 1:18-20에 기록된 바울의 행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메섹에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충만을 받고 - 물세례를 받고 - 즉시 다메섹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복음전도를 시작했으나 -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하므로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로 도망갔다가 - 다시 다메섹으로 되돌아 왔다 - 다메섹에서 예루살렘에 갔다 -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의 안내로 여러 사도들과 교재를 하며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려하므로 - 가이사랴를 거처 다소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 그 후 3년만에 다시 예루살렘에 갔다 - 이번의 예루살렘의 방문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외의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못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바울이 3년 동안 아라비아에서 기도생활을 한 후에 복음사역을 시작하였다는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것으로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바울은 성령세례 곧 성령의 권능충만을 받고 즉시 다메섹에서부터 복음사역에 임하였던 사실을 행 9:16-30은 기록하고 있다.

 

길자연 목사의 주장: “나는 요즘 젊은 목사들에게 개척하지 말라고 말한다.”
나는 요즘 젊은 목사들에게 개척하지 말라고 말한다.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출발했느냐. 이것이 전체 목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준비되지 않은, 준비가 덜 된 목회의 출발은 유보하는 것이 낫다. 요즘은 개척교회하려고 할 때 상당한 액수의 개척자금이 필요하다. 옛날처럼 텐트 치고 할 수는 없다. 사회 구조가 이미 그런 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얻을 개척자금이 있다고 해서 목회가 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고기를 잡는 사람이 고기 잡는 법도 제대로 모른 채 고기 잡는 장비가 있다고 뛰쳐나간다면 어찌 되겠는가. 고기는 장비가 있다고 잡혀지는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사람의 기술에 의해서 잡힌다. 따라서 개척은 가능한 한 늦게 하는 것이 좋다. 개척에 쏟는 열정으로 기도하고 말씀보고 공부하는데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다. 나 역시 신학교 졸업하고 6개월 입산 기도하고 목회에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유학을 하고 5년이나 10년 늦게 목회에 뛰어 들었더라면, 목회자로서의 내 삶과 위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공부가 끝나지 않은 신학교 3학년 때 목회에 뛰어든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학문을 마무리하지 않고 뛰어 드는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인 면에서 힘이 나올 수 없다. 모세는 40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 수업을 받고, 또 연단의 신학생 생활을 40년 더 했다. 영혼을 살리는 기술 역시 오랜 연마가 필요하다. (길자연 목사, 자서전 ‘길자연’ p.130-132)

 

    이상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젊은 목사들에게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고서는 교회를 개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길자연 목사의 이상의 글은 바른 주장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 결코 아니다. 아무리 유명한 신학교를 나오고 외국의 유명한 신학교의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성령세례(충만)를 받지 아니했다면 목사 자체가 되어서는 안 되고, 더욱이나 교회의 개척은 꿈도 꿔서는 절대로 안 된다. 신학교에 들어 가기 전에, 또는 신학교 재학 중에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고, 어느 교회에 주일 날 전도사로 봉사하면서 사마리아 교회의 빌립처럼 신유사역을 행하고, 베드로와 요한과 바울처럼 신자들을 안수하여 성령세례 받게 하는 훈련의 과정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신이 생기면 또한 하나님께서 확신을 주시면 신학교 졸업 후 어느 때든지 개척교회를 시작해도 된다. 길자연 목사의 “모세는 40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 수업을 받고, 또 연단의 신학생 생활을 40년 더 했다. 영혼을 살리는 기술 역시 오랜 연마가 필요하다”는 주장 중에서, “모세는 40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 수업을 받고”라는 주장은 맞는 것이지만, “또 연단의 신학생 생활을 40년 더 했다”는 주장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주장이다. 모세는 40여년 동안 호렙산 주변에서 신학생 생활은 커녕 복음전도의 꿈도 접고 오직 목동의 생활을 했을 뿐이다. 그가 호렙산의 가시떨기 나무의 불을 보고, 하나님께 권능의 지팡이를 직접 받은 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구원하라는 명령에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대답하였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 3-4장)라고 하였다.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볼 때 모세는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하겠다는 꿈도, 생각도, 각오도 일체 없었고 세상을 이별하고 호렙산에서 오직 양치는 목자로서의 생활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길자연 목사가 “모세는 또 연단의 신학생 생활을 40년 더 했다”는 주장은 있을 수 없다. 또한 길자연 목사의 “영혼을 살리는 기술 역시 오랜 연마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맞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했던 그가 무명 성도 아나니아를 통한 신유를 체험하고, 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체험하고, 물세례를 받은 즉시 복음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영혼을 살리는 기술 역시 오랜 연마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바울에게 전혀 적용되지 아니하였다. 또한 예수님의 120명의 제자들 역시 오직 3년간의 신학교육을 마치고 오랜 연마의 시간을 전혀 갖지 않고 예수님의 부활하신 후 50여일 후, 예수님의 승천하신 바로 그날부터 오순절 다락방에서 10여일간의 기도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즉시 복음사역을 시작하였다. 성경에서 말하는 목회자의 복음사역, 교회개척은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고 오직 성경만을 교과서로 삼고 어느 때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원리 원칙이다. 오늘날의 목사들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또는 해외 유학을 마치는 것을 계기로 성령세례(충만)를 받지도 않고 성령세례라는 뜻도 모르고 복음사역에 뛰어들고 있는데 이는 전혀 비 성경적인 그릇된 처사이다. 또한 “요즘은 개척교회하려고 할때 상당한 액수의 개척자금이 필요하다”는 말도 역시 전혀 비 성경적이다. 성경의 한 구절에도 복음의 사역자들이 개척자금을 가지고 개척교회를 시작했다는 기록은 일체 없다. 개척교회를 위한 원리를 마 10:1-15에서 주님께서 구체적이면서도 간결하게 가르치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