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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세례 받는 방법에 대한 일반적인 주장
김기홍 목사의 주장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고, 어떻게 하면 성령의 도구가 되고, 어떻게 하면 성령이 충만하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높은 사람들에게 나도 어떻게 은혜가 충만하느냐 하면 그냥 기도 열심히 하고 불을 받아봐. 불을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 되거든요. (김기홍 목사, 아세아신대 교수, 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 주최 ‘제5회 국제신학학술세미나 자료집’ 1997년 8월 발행, p.80-81, )

 

    이상의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고, 어떻게 하면 성령의 도구가 되고, 어떻게 하면 성령이 충만하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라는 간증은 한국의 기독교가 처한 실상의 표현이다. 여기의 “어떻게 하면 성령을 받고”라는 말은 헬라어 ‘lambano’의 그릇된 번역에서 온 것으로 바른 표현은 “어떻게 하면 성령세례를 받고”이어야 한다. 또한 “어떻게 하면 성령이 충만하느냐”라는 말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충만의 용어 자체를 모르고 한 말이며, 바른 표현은 “어떻게 하면 성령의 권능을 충만히 받느냐”이어야 한다. 신학교 교수인 김기홍 목사의 글은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 온지 100년이 지난 현재까지 한국의 신학계에서 성령론이 일체 정립되어 있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불행한 실례이다.

 

서철원 목사의 주장
요사이 오순절파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세례 받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들을 이해하면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데 전혀 그릇되었습니다. 성령 받음의 유일한 조건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령 받으라고 말하는 자들이 더러 많은데, 성경과 사도들의 증거에 비추어 볼 때 얼마나 그릇되었는지 모릅니다. 사도들은 한번도 성령 받으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받는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 입니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소유라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자만이 그리스도인이고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서철원 목사, ‘성령의 사역’ 1990, p.28,42-46. 서울대 철학과, 동대학원 졸, 총신대학 졸, 미 웨스트민스터대학원 졸, 암스텔담 자유대학원 Ph.D. 장로교 합동총신대 교수 역임, 한영신학대 석좌교수)

 

    이상의 “요사이 오순절파의 주장에 의하면 성령세례 받기 위하여 몇 가지 조건들을 이해하면 성령을 받는다고 하는데 전혀 그릇되었습니다. 성령 받음의 유일한 조건은 주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주장은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 성령세례 받음]이라는 그릇된 공식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서철원 목사의 주장은 근본부터 그릇된 것이다. 서철원 목사가 말하는 그릇된 공식을 가지고서는 성령세례를 받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며, 성령론의 정립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Billy Graham의 주장
성령충만을 받지 못한 사람은 결점이 있는 불완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명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은 어느 곳에 있든지 어떤 연령층에 있든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무적으로 적용된다. 여기에는 예외란 없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만약에 우리가 성령충만을 받지 아니했다면 우리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성령충만을 받기 위한 정연하고 간결한 공식을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Billy Graham, ‘The Holy Spirit’ p.116,133)

 

    빌리 그래함의 주장대로 엡 5:18에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성경에 명령되어 있는데 성경에 성령충만을 받는 간결하며 논리정연한 공식이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않았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육군에서 상관이 부하에게 “총을 쏴라”고 명령을 했다고 하자. 그런데 상관이 부하에게 총을 쏘는 방법도 가르쳐 주지도 아니하면서 “총을 쏴라”고 명령을 했다면 이는 있을 수 없는 언어도단이다. 군대에서 총을 전혀 다룰 줄 모르는 민간인이 군에 입대했을 경우에 총을 다루는 방법과 총을 쏘는 방법을 반드시 자세히 가르쳐 주게 되어 있다. 이는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상식에 속한 문제이다. 군대에서 총을 다루는 방법과 총을 쏘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준 후에 실제로 “총을 쏴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어 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는 누구든지 십자가의 군병이다. 십자가 군병의 총사령관은 예수님이시다. 이러한 총사령관이시며 상관되시는 예수님께서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도 아니하면서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시었다면 이는 상식을 무시한 언어도단적 처사이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시고 이 명령을 내리신 것이다. 따라서 빌리 그래함의 이 부분에 대한 연구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빌리 그래함의 “성령충만을 받기 위한 정연하고 간결한 공식을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주장은 그는 성령충만을 받게 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이는 그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는 1억 5천만명의 새로운 결신자들과 신자들에게 성령충만을 받게 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Richard B. Gaffin의 주장
오순절 사건이 중생의 제2의 축복으로 받게 되는 성령체험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 그것은 매 시간마다 있게 될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표본적 성령체험도 아니다. 사도행전 2장, 8장, 10장, 19장에서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을 때 동시에 또는 그 후에 받는가? 예수님을 믿을 때 동시에 받는 경우는 행 10장과 19장이며, 믿은 후에 받는 경우는 행 2장과 8장이다. 물세례 받기 전후에 받는가? 물세례 받기 전에 받는 경우는 행 10장, 물세례 받은 후의 경우는 8장과 19장이며, 2장은 그 전후 표시가 없다. 성령세례는 안수와 함께 받는가 아니면 안수 없이 받는가? 안수와 함께 받는 경우는 8장과 19장이고, 안수 없이 받는 경우는 2장과 10장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영구적인 표본을 삼는다는 것은 많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딜렘마는 다만 기록자 누가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 속으로 문제를 끌고 들어갈 뿐임을 보이는 것이다. (Richard B. 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 p.22,26, 번역서 p.29)

 

    이상의 “오순절 사건이 중생의 제2의 축복으로 받게 되는 성령체험을 보여주는 것은 더욱이 아니다”라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며, 바른 주장은 “오순절 사건이 중생 후 제2의 축복으로 받게 되는 성령세례의 체험을 보여주고 있다”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매 시간마다 있게 될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표본적 성령체험도 아니다”라는 주장도 그릇된 것이며, 바른 주장은 반드시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을 믿고 중생한 후 교회의 모든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표본적 성령세례의 체험이다”이어야 한다. 이상의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 세례를 동시에 받는 경우는 행 10장과 19장이며”라는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행 10장의 고넬료와 행 19장의 에베소 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이미 하나님을 잘 믿던 신자들이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듣기 전에 이미 중생한 신자들이었으며 구약시대에서 신약시대로의 전환기에 살았던 신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는 경우는 행 10장과 19장이다”라는 주장 자체가 그릇된 것이다. “믿은 후에 받는 경우는 행 2장과 8장이다”라는 주장은 바른 주장이다. “물세례 받기 전에 받는 경우는 행 10장, 물세례 받은 후의 경우는 8장과 19장이며, 2장은 그 전후 표시가 없다”는 주장에서 “2장은 그 전후 표시가 없다”는 주장은 그릇된 것이다. 예수님의 120명의 제자들은 오순절 날 성령세례 받기 전에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았다. 물세례를 받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기도 하며, 물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세례를 받기도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순서가 정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성령세례는 안수와 함께 받는가 아니면 안수 없이 받는가? 안수와 함께 받는 경우는 8장과 19장이고, 안수 없이 받는 경우는 2장과 10장이다”라는 주장은 바른 주장이지만 문제가 있는 주장이다.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와 안수 없이 받는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Richard B. Gaffin의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을 받기 위하여 영구적인 표본을 삼는다는 것은 많은 문제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딜렘마는 다만 기록자 누가가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사건 속으로 문제를 끌고 들어갈 뿐임을 보이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Richard B. Gaffin이 생각하는 것은 사도행전에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이 한 가지만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이 성경에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면 기록된 그대로 믿고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Richard B. Gaffin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성령론, 특히 성령세례를 바로 가르치지 않고 있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풀러신학교를 비롯한 신학교들을 세상의 눈으로 볼때 세계적인 유명한 신학교라고 하더라도 성경을 통해서 보면 성경적인 신학교가 절대로 아니다. 한국을 위시하여 지구 상에서 성령론, 성령세례를 바로 가르치는 신학교는 오늘까지 한 곳도 없다. 만약에 있다고 한다면 어느 신학교인가? 필자에게 이를 알려주면 이상의 필자의 주장을 반드시 철회할 것이다.

 

아쳐 토레이 신부의 주장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은 어떠하다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고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과 마가는 ‘믿으라’(요 7:39, 막 16:17)고 하였고, 누가는 ‘구하라’고 하였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는데는 일정한 방법이나 방식이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아쳐 토레이,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 중에서 발췌)

 

신성종 목사의 주장
사도행전 2장에서 우리는 성령을 받는데 어떤 특정한 모형은 없으며 안수를 꼭해야 한다는 법도 없음을 본다. (신성종 목사, ‘신약신학’ p.132)

 

    위에 열거한 신학자들이 성경에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이나 공식이 없다고 주장한 것은 성경을 잘못 연구했기 때문이며,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과 공식이 한 가지이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릇 주장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10가지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면 그 10가지가 방법이다. 위의 신학자들이 주장한대로 120명이 받은 방법, 사마리아 신자들이 받은 방법, 사도 바울이 받은 방법, 고넬료와 그의 가족이 받은 방법, 에베소 신자들이 받은 방법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면 각각 다르게 기록된 그 방법이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한 가지 방법만을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순절 날에 120명은 안수 없이 성령세례를 받았고, 사마리아 신자들과 바울과 에베소 신자들은 안수를 통하여 받았다. 120명은 설교 중에 받은 것이 아니라 기도 중에 받았고, 사마리아교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를 통해서 받았고, 고넬료는 기도 없이 설교 중에 받았다.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받았다. 세례 요한은 그의 어머니의 모태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 에베소 신자들은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받았다. 행 4:27-31에는 사도들이 군중집회에서 기도 중에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다. 성경의 기록에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으니 반드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다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신학자들은 성령세례(충만)를  받는 이상의 여러 가지 방법들이 일치하지 않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혀 황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세례 받는 방법
    구약시대의 성령론의 연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의 관계를 정립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세례(baptize)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에는 없으며,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에 나오는 용어이다. 벧전 3:20-21에서 베드로는 구약시대의 노아의 홍수 사건, 즉 [물]을 신약시대의 [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해석하였고, 고전 10:2에서 바울은 출애굽의 사실을 기록하면서 신약용어인 [세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설명하였다.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들도 구약성경의 기록을 신약시대의 용어를 사용하여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세례란 단어는 구약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성령충만이란 성령세례와 동의어의 관계로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는 성령충만을 성령세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해석한다고 하여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다. 또한 신구약의 성경은 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신약이나 구약에 나오는 용어를 같이 사용하여 번역하고 해석을 하여도 그릇된 것이라고 비평할 수 없다. 
    모세는 예수님과 120명의 제자들과 같이 사람의 안수 없이 성령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출 3장-4장). 모세 당시의 70인 장로들은 모세와 같이 안수 없이 성령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민11:25). 모세의 종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다(신 34:9). 사울 왕(삼상 9장-10장)과 다윗(삼상 16장)은 선지자 사무엘의 기름부음을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 여기의 기름부음이 왜 성령세례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경우에 눅 3:21-22, 눅 4:1,18, 행 10:38에서 “성령의 임재, 성령충만, 성령의 권능, 기름부음,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이 성령충만 곧 성령세례를 받으셨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그의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성령세례를 받았다(눅 1:15).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성령세례를 받았다(눅 1:35). 예수님은 물세례를 받은 후 기도하실 때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성령세례를 받았다(눅 3:21-22). 예수님의 120명의 제자들은 십여일 동안 오직 성령세례만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면서 10여일간 기도하던 중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받았다(행 1:5-2:4). 120명의 제자들의 이 기도회는 “성령세례 특별기도회”라고 표현해야 적절하다. 사마리아인들은 물세례를 받은 후, 대략 일주일 후에 오직 “성령세례 특별안수기도회”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때 베드로와 요한은 오직 성령세례만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였다. 사마리아 교회는 빌립 집사를 통하여 물세례의 성례전을 가진 후에 예루살렘에 있는 베드로와 요한이 파견되어 성령세례의 성례전을 가진 것이다. 사도행전 8장은 오늘날에도 재현되어야할 복음전도 방법과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을 자세히 제시하고 있다. 마 28:19에 기록된 예수님의 세례를 주라는 명령에 따라 이 명령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이 직접 집전한 전형적인 성령세례의 성례전이었다.
    바울은 성령세례(충만)를 받기 위한 금식기도는 아니었지만 3일간의 금식기도를 하던 중에 사도가 아닌 평신도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다. 이때의 아나니아의 안수는 오직 성령세례만을 받고 신유를 위한 안수였다(행 9장). 예루살렘에 모인 성도들은  군중기도회 중에 성령세례를 받았다(행 4:27-31). 오늘날도 여기에 기록된 베드로의 기도와 같은 기도를 하면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중에 안수 없이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성령세례를 받았다(행 10장). 에베소 교인들은 물세례를 받은 후에 바로 이어서 약간의 시간의 간격이 있은 후에 바울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 이때 바울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기만을 위하여 안수(성령세례 안수식)를 한 것이다(행 19:1-7). 에베소 교회에서 바울은 예수 이름으로 물세례를 베풀고 나서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성령님의 임재와 동의어)를 받게 하였다. 바울이 마 28:19의 예수님의 세례를 물세례로만 해석했다면 물세례 의식만으로 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 28:19의 세례는 물세례만이 아니고 성령세례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석해야 사도행전의 다른 여러 기록들과 논리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된다.
    한편 마 28:19에 근거하여 성례전을 갖는데 오늘날과 같이 물세례만을 베푸는 성례전이었다면 바울이 무엇 때문에 물세례 의식만으로, 물세례의 성례전만으로 끝내지 않고, 별도의 성령세례의 의식을 가졌겠는가는 하는 것이다. 물세례와 성령세례가 다 같이 하나이어야 하는 성례전이었기에 바울은 두 가지 의식을 집전한 것이다. 이는 행 8장에 기록된 빌립과 베드로와 요한이 집전한 물세례 의식과 성령세례 의식과 전혀 동일함을 밝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물세례만의 성례전은 그릇 연구되어 잘못된 가톨릭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물세례의 성례전이 성경에 있지만 가톨릭의 그릇된 전통에 근거한 것이므로 이는 분명히 반쪽만의 성례전이라는 사실이 성경을 통하여 밝혀진 것이다. 현대교회에서 성경에 기록된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두 가지의 성례전을 반드시 집전해야 한다. 그릇 번역된 성경으로 인하여 잘못 연구된 성령론 때문에 마 28:19의 예수님의 명령이 잘못 이행되고 있으니 그릇된 복음이 이제까지 전파되고 있음이 이상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믿고, 물세례를 받고,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교회건물이 웅장하고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할지라도 마 28:19의 [세례]를 [물세례]로만 해석하여 [물세례]만을 베푸는 교회는 절대로 바른 교회가 아니며, 그릇된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성경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그 동안 오순절교단에서 물세례를 받은 신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받을 것을 강조해온 것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마 28:19의 명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모두 받는 것이며, 물세례는 외적인 의식이며, 성령세례는 내적인 것으로 물세례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는다”라고 하여 물세례만을 주고 물세례만을 받는 것으 로 알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분명히 성경에 위배되는 복음을 전하고 있을 뿐이며 바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행 2:1-2에 대한 Gromacki의 해석
‘저희가 한 곳에 모였더니’(행 2:1,1:14 참조)라는 구절은 그들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추론적일 뿐이다. 실제로 성령께서 내려 오셨을 때 그들은 앉아 있었다(행 2:2). 무릎을 꿇거나 서는 것이 기도의 정상적인 자세이었다. 앉아 있는 것은 제자들의 무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들이 이날에 성령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아닌지는 말하기 어렵다. (Robert G. Gromacki, ‘현대 방언운동’ 번역서 p.153)
 
    이상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들이 기도했다는 증거가 없다. (2) 앉아 있었다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다. (3) 그들이 성령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이상과 같은 주장을 하려면 눅 24:49, 행 1:4-2:4를 동시에 전체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눅 24:49에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행 1:4에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행 1:8에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으로 나가라”는 명령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령은 한마디로 성령이 오시는 것을 기대하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사도들이 성령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말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또한 위의 주장 가운데 제자들이 기도했다는 증거가 없다고 하는 데 이것도 역시 어불성설이다. 왜냐하면 행 1:14-15에 120여명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 곧 성령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순절 날까지 약 10일간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위의 주장에서 무릎을 꿇거나 서는 것이 기도의 정상적인 자세이었다. 앉아있었다는 것은 기도의 자세가 아니다 라고 하는데 이것도 역시 억지 주장이다. 여기에서 ‘그들이 앉아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서있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들이 서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앉은 상태에서 기도했다고 해석해야 한다.
    한마디로 120명의 제자들은 주님의 승천하신 날 후 성령이 오시어 권능을 받을 때까지 곧 성령세례를 받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시니 오순절 날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시었다.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과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니 성령세례를 받고, 즉 권능을 받고 증인의 사역을 시작하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기도하면서 기다리다가 오순절 날이 이르러 바람 소리와 불같이 임하신 성령(님)을 통하여 성령세례 곧 성령(님)의 권능충만(성령충만)을 받고 예루살렘으로부터 증인의 사역을 즉시 시작한 것이다. 이상의 사실은 위의 Gromacki의 주장은 성경을 전혀 잘못 연구한 그릇된 주장임을 증거한다.

 

사마리아 신자들이 받은 성령세례에 대한 그릇된 주장
사마리아 신자들에 대한 Anthony A. Hoekema의 주장

사마리아에 일어났던 일은 예외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사마리아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 (Anthony A. Hoekema, 번역서 p.93)

 

    이상의 “사마리아에 일어났던 일은 예외적인 어떤 것이었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왜 이러한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예수 믿음 = 성령 받음, to receive Jesus = to receive the Holy Spirit]의 공식을 가지고 행 8장의 사마리아 신자들을 해석하다 보니 이 공식에 맞지 않기 때문에 “사마리아에 일어났던 일은 예외적인 어떤 것이었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대로 행 8:15-19에 나오는 헬라어 ‘lambano’를 한글로 ‘받는다’로, 영어로 ‘receive”로의 번역은 전혀 그릇된 것인데 이를 바른 번역으로 착각했기 때문에 생긴 그릇된 주장이다. “믿는 자는 사마리아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믿는 자는 믿은 후에 사마리아인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세례(충만) 곧 성령의 은사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이어야 한다.

 

사마리아 신자들에 대한 Robert G. Gromacki의 주장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행 8:15-17). 사도들이 전체 무리의 대표자들로서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이 성령받기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이 경험을 위해 기도했다거나 그들이 이 경험을 할 때 기도하고 있었다는 암시가 없다. (Robert G. Gromacki, 번역서 p.117)  

 

    이상의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행 8:15-17)는 주장은 한글성경의 번역과 영어성경을 통하여 보면 맞는 주장이지만, 행 8:15-17에 나오는 헬라어 ‘lambano’의 그릇된 번역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그릇된 것이다. 따라서 바른 번역과 해석은 반드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성령의 권능충만)을 받았다”(행 8:15-17)이어야 한다.

 

사마리아 신자들에 대한 Stanley M. Horton의 주장
오늘날 몇몇 교역자들처럼 시몬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권위적인 안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많은 여러 구절들이 그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순절 날이나 고넬료 가정에서는 안수했다는 말이 없다.  (Stanley M. Horton, ‘성경이 말하는 성령’ 번역서 p.164)

 

    이상의 “오늘날 몇몇 교역자들처럼 시몬이 성령을 받기 위해서는 권위적인 안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는 주장은 맞는 것 같지만 그릇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반드시 “오늘날 몇몇 교역자들처럼 성령세례(성령의 권능충만)를 받기 위해서는 안수가 필요하다”이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여러 구절들이 그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순절 날이나 고넬료 가정에서는 안수했다는 말이 없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 중에서 행 8장의 사마리아인들, 행 9장의 바울, 행 19장의 에베소인들의 경우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은 사역자의 안수를 통하여 받는 방법과 행 2장의 120명의 제자들과 행 10장의 고넬료의 경우와 같이 안수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해석해야 바른 해석이다. 

 

사마리아 신자들에 대한 차영배 목사의 주장
성령세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집례하거나 혹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도들처럼 안수를 하면서 성령을 준다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사람의 안수로 성령이 내리신다고 할지라도 성령은 오직 아버지에게서 성자로 말미암아 오신다.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세례를 주신다. 사도시대나 그 후의 오늘날이나 이것은 변함이 없다.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고, 예수께서 직접 기름 붓듯 부으신다.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와 같이 먼저 예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은 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확실한 사실을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차영배 목사, ‘성령론’ p.18,160,175) 

 

    이상의 “성령세례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이 집례하거나 혹은 그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사도들처럼 안수를 하면서 성령을 준다는 이가 있으나 이것은 사람을 속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다”는 주장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이 주장은 행 8장의 사마리아 신자들의 경우와 행 19장의 에베소 신자들의 경우와 똑같이 오늘날에도 성령세례를 받은 사역자들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무시한 그릇된 주장이다.
    한편 차영배 목사의 “성령의 세례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고, 예수께서 직접 기름 붓듯 부으신다. 사마리아 교인들의 경우와 같이 먼저 예수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은 후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확실한 사실을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주장은 앞뒤의 말이 일치하지 않고 횡설수설한 주장이다. 즉, “성령세례는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도 줄 수 없다는 주장과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확실한 사실”이라는 주장은 서로 모순된 주장이다. 따라서 차영배 목사가 주장하는 성령론은 횡설수설한 모순 속에 있다.

 

행 8:4-20은 성령세례를 받는 방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6:5에 의하면 빌립은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는데 그는 사마리아성에 내려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은 빌립이 전하는 예수님에 대한 설교를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많은 귀신이 쫓겨나며, 많은 병자들이 치료함을 받아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고, 빌립이 전하는 복음을 믿고 남녀가 다 물세례를 받았다.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고 물세례까지 받았는데, 성령(님)이 아직 한 사람에게도 임하지 아니하여 성령을 한 사람도 받지 못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그들이 성령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고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다. 여기에서 “성령을 받는다”(to receive the Holy Spirit)의 번역은 헬라어 동사 ‘lambano’의 그릇된 번역에서 온 것이므로 바른 번역은 “성령충만 곧 성령의 권능충만을 받는다”(to be filled wit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로 번역해야 한다는 사실을 위에서 살펴보았고 또한 성령충만이란 성령세례와 동의어라는 사실도 살펴보았다. 사마리아 신자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중생하여 구원을 얻었고, 신유와 표적과 기적을 직접 체험하였다. 이와 같이 성령세례(충만)를 받은 사역자 빌립을 통하여 물세례를 받았고, 구원을 얻었고,  신유의 체험, 기적의 체험, 은혜의 체험을 했는 데에도 사마리아의 교회에 있는 한 사람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사마리아의 교회와 신자들의 경우와 전혀 동일한 경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허다하다. 더욱이나 오늘날의 교회에 있어서 일부 오순절교단을 제외하고는 모든 교단에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별개이며, 예수 믿을 때, 중생할 때, 거듭날 때 모두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라고 그릇 주장하고 있으니 신자들은 전혀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사도행전 8장의 사마리아의 경우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성령론 교리를 정립할 수 있다. 말씀충만, 은혜충만, 기적충만, 신유충만의 역사가 이루어진 집회 또는 부흥회라 할지라도 사마리아의 경우와 같이 성령세례(충만)를 한 사람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사마리아의 경우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은 사역자를 통한 “성령세례 안수기도회, 성령세례만을 위한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받을 수 있다. 

 

고넬료는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오늘날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봉사도 잘하며, 헌금도 많이 내며, 철야기도, 새벽기도에도 잘 참석하며, 성경공부에도 잘 참여하며, 기도도 잘하는 신자를 보면 그를 성령충만한 신자라고 말한다. 물론 이들 가운데 성령충만(성령세례)을 받은 신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범적인 신자라고 할지라도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의 경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형적인 실례가 행 10장에 나오는 고넬료의 경우이다. 성경에 “고넬료는 이탈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 10:1-2)라 하였다. 이는 고넬료의 믿음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러한 믿음이 좋은 고넬료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까지 보내주시어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되신바 되었다”(행 10:4)라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었다. 뿐만 아니라 고넬료의 부하들도 베드로에게 그를 소개하기를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며,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는 자”(행 10:22)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상태에 있었고, 일반 사람들에게도 존경과 칭찬을 받는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베드로는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행 10:35)고 하여 고넬료를 높이 칭찬하였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잘 믿는 손색이 없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성령세례(충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행 10:47에 나오는 헬라어 ‘lambano’를 영어로 ‘receive’로, 한글로 “받는다”로의 것은 그릇된 번역으로 바른 번역은 ‘to be filled with’(충만히 받다)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위에서 이미 밝힌바 있다. 고넬료을 통하여 오늘날에도 고넬료와 같이 인간들과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있는 신자라고 하더라도 그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고넬료는 성령세례를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중에 성령세례를 받았다. 고넬료는 예수님의 120명과 같이 성령세례 받기를 기다리며 기도하던 중에 받지 아니하였고, 사마리아 신자들, 그리고 바울과 같이 기도와 안수를 통하여 받은 것도 아니었다. 오늘날에도 고넬료의 경우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은 사역자의 설교를 듣는 중에, 기도 없이, 안수 없이도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세례를 받는 여러 방법 중에서 하나의 방법이다.

 

에베소 교인들은 어떻게 성령세례를 받았는가?
    오늘날 어떤 이들은 성령세례(충만)를 받는 전제조건은 말씀충만이라고 주장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므로 성경말씀을 많이 듣고, 성경을 많이 공부한 후에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얼핏 들으면 옳은 주장인 것 같으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3년간 교육시키시었는데 그들은 주님의 말씀과 행동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성령세례를 받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요 14:25-26에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시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였으나 오순절 날에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는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3년간의 교육과 말씀을 들은 후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니 이것이 순서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제자들의 경우는 오순절 이전이었기 때문이다. 오순절 이후의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제자들처럼 말씀공부를 한 후에 받을 수도 있고, 사마리아 교인들처럼 말씀을 듣고 대략 일주일 후에 받을 수도 있고, 고넬료처럼 설교를 들을 때도 받을 수 있고, 에베소 교인들처럼 말씀을 듣고 물세례를 받은 직후에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성령세례를 받은 사역자의 안수를 통하여 받을 수도 있다. 따라서 성경공부와 말씀충만이 성령세례(충만)를 받는 전제조건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성령세례 받는 방법
사도행전에는 성령세례를 받는 장면이 다섯 군데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제자들(2장), 사마리아 성도들(8장), 다메섹의 바울(9장), 가이사랴의 고넬료(10장), 그리고 에베소 교인들(19장)입니다. 대부분 모여 기도할 때, 사도들이 안수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세례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 종의 안수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 ‘오중복음 이야기’ p.78) 

 

    이상의 “오늘날 성도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의 종의 안수를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의 주장은 애매한 주장이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새벽기도, 금요철야기도, 산기도, 금식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다는 소식은 거의 없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설교를 잘하는 유명한 목사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하여 열심히 듣지만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다는 소식은 없다. 각종 부흥집회를  위시하여  수많은 교회의 집회와 각종 모임에서 주의 종들의 안수를 수도 없이 많이 받지만 성령세례(충만)를 받았다는 소식은 없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성령세례(충만)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인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사가 먼저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의 관계, 왜 성령세례(충만)를 받아야 하느냐”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며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신자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오늘날 성도들도 열심히 기도하는데 왜 성령세례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가? 사도행전 1:14-15의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모인 무리의 수가 약 백이십명이나 되더라”의 기록을 잘 이해해야 한다. 120명의 제자들이 오직 기도를 하던 중에 오순절 날 성령세례(충만)를 받은 것 같이 오늘날도 그들과 같이 열심히 기도하면 받는다고 가르치는데 이는 그릇된 것이다. 행 1:4-5,8에 근거하여 120명의 제자들은 성령세례 즉 성령님의 권능을 받고 증인의 사역을 위한 기도회에 모여 기도했음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기만을 위한 기도회”에서 오직 이 목적만을 위하여 10여일 동안 기도한 결과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각종 기도모임에서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하더라도 120명의 제자들과 같은 “성령세례만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기도회를 갖지 않기 때문에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사도들이 안수할 때 성령세례를 받았듯이 오늘날도 주의 종이 안수했는 데에도 왜 성령세례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가?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여 사마리아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았고, 사도 바울이 안수하여 에베소 교인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 여기에서 반드시 알아야 할 사항은 베드로와 요한은 오순절 날 다락방에서 성령세례를 받았고,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를 받았다. 성령세례를 받은 주의 종들이 안수하여 초대교회의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은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중생할 때 성령세례를 모두 다 받았다고 그릇 번역하고 그릇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주의 종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안수한다고 하더라도 성령세례의 역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초대교회와 같이 반드시 성령세례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주의 종들이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신자들에게 안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이다. 


    넷째,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들을 때 고넬료와 그의 가족과 친지들은 성령세례를 받았다. 오늘날에도 주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어찌하여 성령세례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은가? 베드로는 이미 성령세례를 받았다. 고넬료의 경우에 베드로는 성령세례를 받은 주의 종으로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성령세례를 받는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주의 종이 설교를 아무리 유창하게 지혜롭게 잘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성령세례를 받지도 아니했을 뿐만이 아니라 성령세례를 인정하지도 않고, 신자들에게 성령세례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지도 않는 상태에서의 설교라고 한다면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났던 성령세례를 받는 역사는 절대로 일어나지 아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