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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성수 목사가 주장하는 성경해석법
성경은 무오하지만 성경해석은 유오할 수 있고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해석은 성경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참으로 발견하기 위해서 마치 가재를 잡기 위해 모든 돌을 다 들쳐 내는 것처럼 성경을 자세히 연구하는 자세에서 오는 것으로 보고 해석학적 융통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권성수 목사, ‘성경해석학’ 1991, p.110.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성경해석학 신학박사 취득. 총신대학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 성경해석이란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해석자의 경건성은 너무도 중차대한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가 누구냐에 따라 본문이 같은 데도 설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건한 해석자, 경건한 설교자는 매우 중요합니다.(권성수 목사, 옥한흠 목사와 여러 목사들의 공동 집필, '내 마음을 찢자' p.239)

 

    “성경은 오류와 모순이 일체 없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정통 기독교 계통의 신학교 교수들이나 목회자들은 일체 없다. 그런데 “성경해석이란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설교자가 누구냐에 따라 본문이 같은 데도 설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 있다”는 주장을 용납할 경우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고찰해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해석이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것을 수용하여 창 1:1에 대한 실제의 성경해석에 적용시킬 경우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살펴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었다”는 것도 맞는 해석이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지 아니 하시었다”는 것도 맞는 해석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성경해석이란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것은 천부당만부당 그릇된 주장이다. 성경해석의 원리는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창 2:7)

    “성경해석이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것을 수용하여 창 2:7에 대 한 실제의 성경해석에 적용시킬 경우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살펴보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도 맞는 해석이며, 베뢰아 이단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김광신과 김기동 처럼 “하나님께서 처음에 지은 사람은 영혼이 없는 동물과 같은 사람이며, 그후에 이들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오늘날의 우리의 조상인 생령이 있는 즉 영혼이 있는 아담이 된 것이다”라는 주장도 맞는 해석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해석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성경해석은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것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행 4:12)
    “성경해석은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것을 수용하여 행 4:12에 대한 실제의 성경해석에 적용시킬 경우에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살펴보자. 이 구절은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다”라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해석 이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것을 이 구절에 적용하면 다음과 같이 해석해도 된다는 주장이 된다. 감리교신학교의 전 교수였던 변선환 목사가 주장했었고 가톨릭에서 주장하는 “예수님 이외의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해석도 맞는 것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행 4:12는 반드시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다”라고만 해석되어야 한다. 이외의 해석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성경해석이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전혀 비 성경적인 것이다. 권성수 목사는 옥한흠 목사와 오정현 목사가 소속된 장로교 합동교단의 출신으로 이러한 내용을 총회신학교에서 가르쳤고, 이러한 그릇된 성경해석의 원리에 대한 글이 옥한흠 목사의 글과 같이 책으로 출판되어 한국의 기독교계에서 반론이 없이 수용되고 용납되고 있다는 사실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들의 백합화”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듯이 성경도 해석자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바른 것인가.
마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여기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나오는 “들의 백합화”는 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듯이 성경해석도 성경을 보는 이에 따라 해석자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목회자들이 있다. 이 주장을 얼핏 보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들의 백합화”는 분명히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슬픔에 잠긴 자에게는 슬픔의 꽃으로, 외로운 자에게는 외로움의 꽃으로, 이 꽃을 결혼식장에 갖다 놓으면 기쁨의 꽃으로, 장례식장에 갖다 놓으면 슬픔의 꽃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들의 백합화”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듯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도 해석하는 사람이나 설교하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다르게 설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왜 그릇된 주장인가? 
    예수님께서 마 6:28에서 말씀하신 “들의 백합화”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마 6:25-34의 기록 전체를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의 전체의 주제는 믿는 신자들이 의식주의 문제로 염려하지 말라는 내용이다. 이를 주님께서 설명하시면서 “공중에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신 것이다.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를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의식주를 돌보시지 아니하시겠느냐는 말씀이다. 또한 들의 백합화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 더 영광스러운 꽃이라고 하시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들의 백합화”는 외로움이나 슬픔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영광의 꽃이라는 설명이시다. 따라서 어느 신학자이건 설교자이건 마 6:28에 기록된 “들의 백합화”는 이상에서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이외의 뜻으로 해석하거나 설명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성경해석이란 그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설교자가 누구냐에 따라 본문이 같은 데도 설교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게 되어 있다”는 주장은 성경에서 전혀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그릇된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