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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말하는 성경연구 방법론, 번역법, 해석법
잠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잠 30: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다”의 말씀의 의미는 신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조직적이며 체계적이어서 오류와 모순이 일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구절의 번역과 해석이 다른 구절과 비교해서 모순과 오류가 생겼다면 이러한 번역과 해석은 그릇된 것이다. 일례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아무런 잘못과 죄가 없는 하나님의 자녀를 질병으로, 물질적으로 고난을 주시는 분으로 번역하고 해석했다면 이는 모순으로 잘못된 것이다. 현대판 성경의 고전 12:13의 번역에 의하면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모두 받은 것으로 되어 있고, 4복음서와 행 1:4-2:5에 의하면 예수님을 이미 믿고 있던 제자들이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오순절 날에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와 4복음서, 사도행전에 오류와 모순이 있다. 그런데 성경은 순전하여 분명히 오류와 모순이 없다. 그러나 이상의 예를 통해서 볼 때 성경에 기록된 성령론에 오류가 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문제는 간단하다. 현재의 미국을 위시한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릇 번역된 고전 12:13의 번역을 맞다고 믿는 착각에서 온 것이다. 고전 12:13에 나오는 헬라어 전치사 'eis'를 모든 영어성경에서 'into'로 잘못 번역해서 온 오류이기 때문에 이 단어를 바르게 번역하면 성경에 기록된 성령론은 일체의 모순과 오류가 없어 성경은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는 진리의 책이 된다. 따라서 바른 번역이 없이는 바른 해석은 절대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하다가 난해구절을 만나면 자기들의 인간적인 생각을 가지고 “특정한 단어 혹은 특정한 말”을 자의적으로 가감하는데 잘못하면 거짓말하는 자가 된다는 경고의 말씀이다. 일례로 행 2:17-18에 나오는 헬라어 'apo'라는 단어를 KJV 이외의 모든 번역 성경에서는 없애버렸고, NKJ은 행 2:17에서 이 단어를 'of'로 번역했으나 행 2:18에서는 'of'의 단어를 삭제하여 성경을 억망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글성경에도 마찬가지로 그릇 번역하여 “성령을 부으신다”는 말이 성경에 없는데 있는 것으로 만들어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물론이고 일반 신자들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그릇 번역하고 그릇 해석하면 진리가 비 진리로 둔갑되어 마귀에게 잡히게 되어 있다.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신 12:32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시었을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가감하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을 하신 것이다. 절대로 가감해서는 안 된다. 창 2:15-3:6과 마 13:18-40을 자세히 연구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게 하는 자는 마귀가 그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배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 “가감한다”는 것은 가감하여 본래의 뜻을 왜곡시켜 본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창 3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마귀는 가감하여 “정녕 죽지 않으리라”는 말로 바꾸어 본래의 뜻이 아닌 것으로 만들었고 마귀의 이 말을 받아먹은 하와는 그녀의 생각에 혼돈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그녀의 생각이 마귀에게 잡혀 범죄하였고, 남편 된 아담은 공범자가 된 것이다. 오늘날에도 마귀는 번역자들과 해석자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 그들의 생각을 혼돈하게 만들어 번역과 해석을 그릇하게 하고 있다. 그릇된 번역과 그릇된 해석을 그대로 받아 먹었다는 것은 마귀에게 미혹당하여 잡혀 먹혔다는 증거이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고전 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벧후 3:15-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들이 성경을 억지로 푼다”(They wrest the Scriptures)에서 “억지로 푼다”는 단어는 헬라어 'strepho'인데, KJV에서는 이를 'wrest'로, NKJ에서는 'twist'로, NIV는 'distort'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는 한글로는 “비비꼬다. 비틀다”의 뜻이다. 여기에서 “비비꼬다. 비틀다”라는 말은 전혀 없는 것을 가지고 “비비꼬다. 비틀다”는 뜻이 절대로 아니다. 이 말은 “이미 있는 것, 이미 존재하는 것”을 가지고 비비꼬며 비트는데 사용하는 말이다. 즉 본래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것을 비비꼬아서 본래의 모양을 변형시켜서 다른 모양으로 만드는데 사용하는 말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을 비비꼬아서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말을 다른 뜻의 말로 바꾼다는 뜻으로 사용할 때 쓰이는 말이다. 이를 한글로 “억지로 푼다”로 번역했는데 이는 적절한 번역은 결코 아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난해구절을 만났을 경우에 소위 세상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나 목회자가 저술한 주석 책이나 설교집을 참조하여 해석하는데 이러한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어느 한 구절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는 신구약성경 어느 곳에든지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나와 있으니 오직 성경 안에서 그 뜻을 찾아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해석법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가미하여 잘못 해석하면 거짓말하는 자가 되고 멸망을 당할 수 있다. 따라서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오직 신구약성경에 온전히 능통해야 한다. 성경은 무오류의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혼란된 번역과 해석으로 인하여 혼란된 오류의 말씀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조직적이며 체계적으로 기록된 말씀이다. 예를 들어 어느 한 구절의 번역과 해석이 다른 구절의 번역과 해석과 서로 모순되었다면 그 번역과 해석은 그릇된 것이다. 따라서 어느 구절의 번역과 해석은 다른 구절의 번역과 해석이 전혀 일치해야 한다. 만약에 이들이 일치하지 않고 모순된 번역과 해석이 되었다면 무 오류의 성경을 오류의 성경으로 만들어버린 결과가 된다. 그리하여 성경을 근거한 해석이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이 아닌 것으로 되어 바로 다른 복음이 되기 때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경고하였다. 따라서 복음전도를 하는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은 복음사역을 하기 전에 성경에서 말하는 성경해석법을 철저히 알고 성경 연구에 전심전력을 하는 자세를 가지고 복음사역에 임해야 한다.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고전 4:6에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Do not go beyond what is written)고 말씀하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성경이 말하지 않고 있는데 인간적인 말을 자의로 첨가하여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의 말씀을 어기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주장
설교자는 성경을 본래의 뜻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여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갖고 있습니다. 자칫 성경해석을 잘못하게 되면 설교자로서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며 이것이 지나치면 이단사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용기 목사, ‘나는 이렇게 설교한다’ 1996, p.384)

 

    이상의 “자칫 성경해석을 잘못하게 되면 설교자로서 가장 큰 죄를 범하는 것이며 이것이 지나치면 이단사설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라는 주장은 바른 주장이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가 저술한 그의 모든 책들과 모든 설교들은 한결같이 성경해석을 잘못하여 그가 말한 데로 이단사설이 되어버렸다. 추후에 이에 대하여 자세히 밝히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읽을 때에는 반드시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의 조명을 우리 마음에 받아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 ‘새신자 교육교재’ p.69)

 

    조용기 목사는 여기에서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조명’이라는 뜻을 밝히지 아니하여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신자들과 신학생들을 오도하고 있다.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조명’이라는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경에 기록된 성령의 감동이란 말의 뜻을 연구해야 한다.

 

벧후 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NIV  For prophecy never had its origin in the will of man, but men spoke from God as they were carried along by the Holy Spirit.
KJV  For the prophecy came not in old time by the will of man: but holy men of God spake as they were moved by the Holy Ghost.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성경의 모든 예언 즉 성경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관한 책으로 성령의 감동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사 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 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NIV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him in power so that he tore the lion apart with his bare hands as he might have torn a young goat.

   

벧후 1:20-21에서 성령의 감동이란 사사기 14:6에서 여호와의 신(성령)에게 감동된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이란 바로 성령께서 권능으로 임하신 것을 말하고 있다. 성령께서 권능으로 임하심이란 행 1:5,8, 2:3-4에서 성령세례(성령충만, 권능충만)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란 성령세례(충만)를 받은 사람이며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란 바로 성령세례(충만)를 받은 사람들이란 뜻이다. 성경은 성령세례(성령의 권능충만)를 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 곧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반드시 성령세례를 받아야 바로 읽고 바로 깨달을 수 있다.

 

엡 1:17-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KJV  That the God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Father of glory, may give unto you 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in the knowledge of him:
NIV  the God of our Lord Jesus Christ, the glorious Father, may give you the Spirit of wisdom and revelation, so that you may know him better.

 

    이상의 KJV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라는 번역은 바른 번역이 아니며, NIV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너희에게 주사”가 바른 번역이며, 더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은 “아버지께서 성령의 지혜와 계시를 너희에게 주사” (God may give you the wisdom and revelation of the Spirit)이어야 한다. 이는 고전 12:7-11에 나오는 성령께서 주시는 9가지 은사 중에서 지혜와 지식과 예언(계시)에 관한 은사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의 눈을 밝혀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너희 마음의 눈을 밝혀서”라는 말은 바로 성령의 조명을 뜻한다. 
    벧후 1:20-21, 사사기 14:6, 엡 1:17-20의 기록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성령의 감동 즉 성령세례(권능충만)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읽는 사람 역시 성령세례를 받아 바로 성령의 지혜와 지식과 예언(계시)을 받아 즉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마음의 눈이 열려야 이해할 수 있다.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NIV We have not stopped praying for you and asking God to fill you with the knowledge of his will through all spiritual wisdom and understanding.

   

    골 1:9에 대한 한글성경의 번역은 이해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번역이다. 바른 번역은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우게 하시고”이어야 한다. 이 말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지식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통하여 얻어지게 된다는 말씀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기록된 성경을 알기 위해서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식으로 충만히 채워주셔야 한다. 성령충만이란 그릇된 번역에서 온 것으로 바른 번역은 성령의 권능충만이며 이 권능은 성령의 9가지 은사를 포함한다. 이 성령의 9가지 은사 가운데 지식과 지혜의 은사가 있다. 여기에 나오는 지식과 지혜는 성령세례(충만)를 통해서 얻어진다. 따라서 성령세례를 받은 하나님의 종들에 의하여 기록된 성경을 알기 원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다. 

     

골 2:2-3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여기에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져 있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성경을 이해해야 하며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주시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하며 성령세례를 통해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의 은사를 받아야 한다. 그리하면 요일 2:27의 말씀으로 응답 받게 된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NIV As for you, the anointing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in you, and you do not need anyone to teach you. But as his anointing teaches you about all things and as that anointing is real, not counterfeit just as it has taught you, remain in him.

 

    여기의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는 말씀은 눅 4:1,14,18, 행 10:38에 근거하여 성령세례(충만)를 의미한다.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성령의 권능을 받는다는 말이며, 이는 곧 성령의 9가지를 받는다는 말이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누구에게나 성령의 지식과 지혜의 은사가 임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지식과 지혜의 은사가 우리의 스승이 되어 성경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이다.

 

요 16:12-14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예수님은 3년여 동안 지상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필요한 모든 지식을 전부 가르치시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의 진리의 말씀가운데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말씀에 따라 제자들은 오순절 날에 오신 성령님을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의 말씀을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을 통하여 깨닫고 예수님의 진리를 온 세상에 전파하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의 경우에도 성령세례를 통하여 지식과 지혜를 받지 않고서는 절대로 성경을 바로 번역하고 바로 해석하고 바로 깨달을 수 없고 바로 전파할 수 없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을 통하여 각 사람을 가르쳤고, 이 가르침을 서신서들에 기록하였고, 이 서신서들을 통하여 오늘날의 믿는 자들에게도 가르치고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과 같이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바울을 통해서 전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로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현대목회 사역에 있어서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를 따진다. 소위 유명한 신학교 출신이면 그가 제대로 된 올바른 성경지식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를 인정한다. 이와 같이 유명한 신학교 교수의 밑에서 교육을 받은 경우에 바른 성경지식을 가지고 졸업한 사역자가 있을 수 있다. 유명한 신학교 교수를 스승으로 여기고, 신문에 본인은 XX 신학교 XX 교수의 밑에서 XX 과목을 전공했다고 선전하는 신문광고를 종종 접하게 된다. 한국의 어떤 신학교에서는 “세계적인 신학자 피터 와그너 교회성장연구소”라는 간판까지도 붙이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께 직접 교육을 받은 사도 요한은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친다”(요일 2:27)고 하여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우리를 가르칠 선생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이는 무슨 뜻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스승은 유명하건 유명하지 않든 간에 신학교 교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에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선생이 되어서 그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하였다.

 

여기의 “기름 부음”이란 무슨 뜻인가?
    한글성경으로서는 기름 부음의 뜻을 해석이 불가능하므로 영어성경을 보아야 한다. 요일 2:27에 나오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the anointing you received from him remains in you)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눅 4:18과 행 10:38의 기록을 동시에 같이 놓고 연구해야 한다. 

 

눅 4: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NIV The Spirit of the Lord is on me, because he has anointed me to preach good news to the poor.
행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NIV  how God anointed Jesus of Nazareth with the Holy Spirit and power, and how he went around doing good and healing all who were under the power of the devil, because God was with him.

 

    요일 2:27의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His anointing teaches you about all things)에서 “기름 부음”(anoint)의 용법을 알아야 한다. 영어에 있어서 이 동사는 관용구로서 전치사 ‘with’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 즉 [anoint + with]이어야 한다. 따라서 눅 4:18은 [He has anointed me + with]이어야 한다. 그런데 눅 4:18의 예수님께서 받으신 [anoint + with]는 행 10:38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how God anointed Jesus of Nazareth with the Holy Spirit and power)에서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은 반드시 ‘God anointed Jesus of Nazareth with the Holy Spirit’s power’ 또는 ‘God anointed Jesus of Nazareth with the power of the Holy Spirit’이어야 한다. 즉 예수님은 성령님의 권능(the power of the Holy Spirit)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다. [성령님의 임재 = 성령님의 기름 부음 = 성령의 권능 = 성령세례 = 성령충만]이라는 교리가 눅 3:22, 4:1, 4:14, 4:18, 행 1:5,8, 2:3-4, 10:38를 통하여 정립된다. [성령님의 기름 부음 = 성령의 권능 = 성령세례 = 성령충만]을 받으면 이것이 진리로 인도한다는 뜻이다. 요일 2:27의 뜻은 성령님의 기름 부음이 진리를 깨닫게 하는 선생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경을 깨닫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후에 반드시 성령세례(성령님의 권능충만)를 받고 오직 성령님께만 의지하면 성경이 해석된다는 뜻이다. 이상의 기록에 근거하여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교 교수를 스승으로 여기고 그에게서 성경을 배우려한다는 것은 성경에 위배되는 처사이기 때문에 절대로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거나 깨달을 수 없다. 신학교에 다니는 신학생은 그곳의 교수에게서 일단은 배워야 하는데, 그 교수의 가르침 가운데 성경적인 것과 비성경적인 것이 섞여있다는 사실을 알고 최종적으로는 오직 성경을 통하여 신학생 본인이 확인하고 받아들일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해야 한다. 소위 유명한 신학교의 유명한 교수의 가르침은 바로 성경의 가르침과 동일하다고 믿고 있는데 이는 착각이며 큰 실수이다.
    역대하 16:9의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의 말씀에 따라 성경의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 전심으로 성령님께 의지하면 성령님께서 능력을 베푸셔서 깨닫게 된다. 이러한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소위 유명한 신학자나 유명하다고 하는 목회자가 써놓은 주석 책에 의지하면 성경은 절대로 바르게 번역하고 해석할 수 없다. 믿는 자의 스승은 오직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님의 권능의 기름 부음이라는 사실을 믿고, 오직 성경의 말씀 안에서 뜻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그 믿음을 보시고 먼저 육의 눈을 열어 주시고, 동시에 영안을 열어주셔서 성경 말씀이 눈에 보여 그 뜻을 깨닫게 된다. 요일 2:27의 기록을 믿고 먼저 성령세례를 통하여 성령님의 권능을 받고 성령님께 의지하면 성령님의 권능이 역사하여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을 통하여 성경을 바르게 번역하고 바르게 깨닫게 된다.

 

약 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성경을 연구하는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특정 성경을 연구할 경우에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나 목회자가 저술한 책에 기록된 그들의 주장이나 해석을 성경에서 말하는 것이라 믿고 그대로 인용하여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신학자나 목회자가 저술한 책이 맞는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 그릇되었을 경우 그릇된 것을 바른 것으로 수용할 경우에는 이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는 갈 1:6-9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곡해시키는 사람들이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갈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이상의 기록에서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를 분석해보자. “너희의 받은 것”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다. 예를 들어 성경에 성령(님)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호와 증인들은 성령(님)을 '힘' (force)으로 취급하여 그들은 이단이 되고 말았다. 한국의 모든 정통교계와 신학계에서 일체의 예외 없이 성령님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가르치면서 한편으로 일체의 예외 없이 모든 신학자들과 모든 사역자들은 성령님을 물질취급하고 있다. 어떻게 하여 성령(님)을 물질 취급하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필자의 저서인 성령론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그릇된 번역과 그릇된 해석으로 인하여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말씀이 아닌 것으로 변경되어 가르쳐지고 있는 내용이 수없이 많다. 또한 예를 들어 보면 모든 질병은 십자가 밑에 나오면 일체의 예외 없이 치유 받을 수 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잘못 해석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가르침으로 인하여 수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한편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본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릇 번역하고 그릇 해석하여 가르치면 이는 다른 복음 곧 이단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갈 1:6-9에 기록된 말씀이다. 번역이 어려운 경우와 해석이 어려운 경우에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와 목사들이 써놓은 신학서적이나 설교집이나 강해집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번역과 해석을 성경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이는 약 1:5-8의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의 말씀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조용기 목사의 그릇된 해석의 실례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죄를 사하실 때마다 마귀가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마귀가 소리치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의 죄를 사하시는 순간 마귀가 그 사람을 종으로 삼을 조건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조용기 목사, ‘삼박자 구원’ p.260)

 

    조용기 목사의 이상은 신유론에 대한 글이다. 조용기 목사가 대형교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해석과 설교가 성경에 입각한 바른 것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수용한다. 그러나 조용기 목사의 말대로 성경 어디에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마귀가 소리치고 떠나갔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마 12:22에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는 기록에 귀신이 소리 지르며 나갔다는 기록이 없다. 따라서 조용기 목사의 위의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마귀가 소리치고 떠나갔다는 해석은 그릇된 것이다. 조용기 목사가 바른 해석을 하려면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 마귀가 소리치고 떠나가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어야 한다. 혹자는 조용기 목사의 위의 사소한 해석을 가지고 “그릇된 해석이라고 비평할 수 있느냐”라고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소한 해석으로 보이지만 절대로 사소한 해석이 아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죄를 사하실 때마다 마귀가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마귀가 소리치고 떠나갔다”는 것을 분석해 보자. 여기에서 “죄를 사하시고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마귀가 소리치고 떠나갔다”고 했으니 이 주장대로라고 한다면 “마귀는 소리를 치지 않고는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천부당만부 당한 말이다. 마귀는 마귀들린 사람 본인도 모르게 살짝 들어왔다가 그 사람 본인도 모르게 떠나가는 경우도 있음은 마 16:21-23에 기록된 베드로의 경우이다.
    조용기 목사의 위의 주장을 수용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자. 오늘날의 경우에도 마귀 들린 사람의 경우에 성령님의 치유의 역사를 통하여 마귀가 소리치지 않고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때에 마귀가 나갈 때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니 마귀가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조용기 목사의 마귀와 치유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일부분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확대시켜 전 성경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 그릇된 해석과 그릇된 주장이 되어버렸다. 조용기 목사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죄를 사하실 때마다 마귀가 떠나갔습니다”는 주장은 성경에 이러한 기록은 일체 없다. 행 16:16-19에 점하는 귀신의 경우에 조용기 목사의 해석은 일체 적용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며 마귀의 정체를 모르면 누구든지 마귀에게 잡히게 되어있다는 사실이 마 13:43-45를 위시하여 성경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조용기 목사의 그릇된 해석이 그의 모든 설교와 모든 주석 책에 무수히 담겨져 있어서 그의 설교와 주석 책을 성경적인 진리로 믿는 순복음교단의 목회자들과 신자들과 나아가서 그를 위대한 목회자라고 믿고 있는 많은 목회자들과 신자들을 심각하게 오도하고 있다. 그의 설교와 주석이 성경적인 것으로 믿으며 세계에서 대형교회라는 거창함에 압도당한 목사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은 한국장로교 예장합동측의 교회 중에서 최대를 자랑하는 옥한흠 목사이다. 한국에서 초대형교회를 이룩한 목사들이 한국교회를 비 성경적인 마귀의 길로 오도하고 있으니 이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성경에 없는 것이나 성경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성경에서 본래 말하는 말씀과 다르게 가르치면 이는 분명히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은 마귀이며 마귀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 속에 들어가서 그를 통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의 눈에 사소하게 보이는 그릇된 번역과 그릇된 해석이 계속하여 쌓이고 쌓인 결과로 신자들은 그릇된 진리로 오염되고 그 결과는 목회자와 신자들이 공히 마귀에게 미혹당하고 결과적으로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 어찌하여 과거에는 많이 나타났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유의 기적이 오늘날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성경 안에서 찾아 바로 정립하지 못하면 현재 한국오순절교단에서 복음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이나 앞으로 목회사역을 하려는 신학생들과 조용기 목사를 따르는 비 오순절교단의 사역자들도 똑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신유의 기적은 신유의 기적을 행하는 목회자에게 성령님이 함께 역사해야만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에는 신유의 역사가 있었고 현재는 없다면 현재는 성령님이 함께 역사하지 아니하신다는 증거이다. 해외의 집회에서는 나타난다고 하지만 한국의 여의도순복음교회 내에서는 전혀 없는데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인가? 오늘날 여의도순복음교회 내에서와 오산리금식기도원에서 신유의 역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필자가 2년 동안 직접 확인한 것이며 총신대 교수인 서철원 목사가 저술한 ['성령신학' p.217, 1998년 발행]에서도 “오산리금식기도원은 더 이상 병이 기적적으로 치유된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서철원 목사의 이 주장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것이 사실이 아니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바이지만 그러나 만약에 이것이 사실이라면 조용기 목사에게 과거에 역사하시던 성령님의 권능이 이제는 떠났다는 증거이다. 삼손에게 계속하여 나타났던 성령님의 권능의 역사는 그가 범죄함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아니 했는데 이것은 성령님이 떠나셨다는 증거였다. 삼손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한번만 권능을 달라고 간구했을 때 주시었고, 원수를 갚은 후에 그것으로 그는 죽고 말았다. 성령님이 떠나시면 그 자리에 마귀가 들어온다고 사무엘상 16:14는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13:43-45에서도 이를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일점일획의 오류와 모순이 없기 때문에 번역과 해석에 있어서도 일점일획의 오류와 모순이 없이 바르게 번역하고 해석하는 일과 성경을 철저히 알고, 오직 성경에 능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한마디도 가감하지 말고, 목회사역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수없이 반복하여 강조되어야할 사안이다. 이것이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의 생명이다. 이 사실을 무시하던지 소홀히 한다면 비록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요한계시록 2:1-5에 기록된 에베소교회 처럼 책망을 들을 것이며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실 것이다. 이는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조용기 목사의 아래의 글도 역시 그릇된 해석이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 앞에서 그의 영이 죽었고 그의 영이 죽자 하나님과의 대화가 끊어졌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범죄함으로 그들의 영은 즉시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 죽음은 없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고 부패하여 사망의 근원인 마귀에게로 사로 잡힌다는 의미입니다. (조용기 목사, ‘삼박자 구원’ p.41,245)

 

    이상의 주장은 창세기 2-6장의 기록을 제대로 한번 읽어보지도 않고 해석한 것이라는 비난을 피할 길이 없다. “아담이 범죄하자 하나님 앞에서 그의 영이 죽었다”는 것은 전혀 그릇된 주장이다. 범죄한 아담의 영이 죽었다면 범죄한 후의 살아있던 아담은 영은 없고 육체만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인데 이는 어불성설이다. 범죄한 아담의 영은 절대로 죽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계속하여 대화하시고 가죽 옷을 입혀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등장하며 범죄한 아담의 자손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 에녹과 같은 자녀도 있었고 노아도 있었다. 만약에 조용기 목사가 이 구절들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었다면 이렇게 그릇되게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용기 목사의 주변에 그의 잘못된 해석을 지적해줄 친구 목회자나 또는 진정으로 돕는 측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그가 저술한 모든 책이 일체의 예외 없이 증거한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어찌하여 그가 쓴 모든 책에 무수히 비 성경적인 것들이 들어있게 된 것인가? 조용기 목사는 위의 글에서 “영이 죽었다는 의미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되고 부패하여 사망의 근원인 마귀에게로 사로잡힌다는 의미이다”고 하였는데 어느 성경의 구절을 근거로 하여 이러한 해석을 하게 되었는가?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에 일체 없다.
    조용기 목사는 “구리로 뱀을 만들어 누구든지 그것을 처다 보는 자마다 고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사망권세를 갖고 우리를 괴롭히던 원수마귀가 처절하게 패배당할 것을 예언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실제로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하여 문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삼박자 구원’ p.274). 모세의 놋 뱀은 하나의 예언적 사건으로써 모세가 장대에 높이 뱀을 매어단 것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요한계시록 12:9) 원수 마귀의 온전한 패배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마귀의 전적인 패배를 의미합니다”(‘삼박자 구원’ p.274)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마귀는 처절하게 패배 당했다”는 주장이다. 또한 조용기 목사는 “귀신은 오늘날도 우리가 성령님을 떠나고 육신이 살아나면 즉시로 우리의 생각을 점령하고 자기 거처를 삼습니다”(‘삼박자 구원’ p.310)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주장에 의하면 마귀(귀신)는 처절하게 패배당한 것이 아니기에 육신이 살아 있는 믿는 신자 안에 거처를 삼는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조용기 목사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사도행전 2:33).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그가(성령)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은 다 내 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리라 하였노라’(요한복음 16:14,15).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이 곧 당신이 이 지상에서 행하신 죄사하심과 병 고치심의 구속 사업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뜻이요 목적입니다” (‘삼박자 구원’ p.296)라고 주장한다. 


    이상의 설명 중에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이 곧 당신이 이 지상에서 행하신 죄사하심과 병 고치심의 구속 사업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계십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뜻이요 목적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구원의 뜻이요 목적입니다”라는 해석은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해석이다. 행 2:33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행 2:1-38의 전체를 놓고 해석해야 한다. 행 2:33에서 말하는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은 행 2:3-14에 “오순절 날 120여명의 제자들이 성세례(충만)를 받고 방언을 말하는 것을 보고 그 방언을 듣는 것”이라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의 성경해석은 이상에서 보여준 것 이외에 황당한 그릇된 것이 무수히 많다.

 

성경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상의 자녀들에게 보낸 편지로 비유할 수 있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대부분은 바울서신, 베드로서신 등의 서신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구약성경은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이사야, 다니엘 등을 통하여 보내주신 하나님의 편지라고 해석해도 하자가 없다. 이것을 비유하면 한국에 있는 자녀들과 미국에 있는 자녀들과 독일에 있는 자녀들,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똑같이 보내주신 편지의 글이다. 이 편지의 글을 읽는 자녀들이 각각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해석은 왜 어불성설인가?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뉴욕에 있는 아들과 시카고에 있는 아들과 서울에 있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편지를 썼다고 가정해보자. 그 편지를 읽어 본 뉴욕에 있는 자녀들이 그 편지를 해석하기를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를 뉴욕으로 오라고 하시었다고 주장한다. 시카고에 있는 자녀들은 해석하기를 그 편지에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를 시카고로 오라고 하시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울에 있는 자녀들은 해석하기를 그런 곳이 아니라 서울로 모두 오라고 하시었다고 주장한다. 성경을 이와 같이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을 용납한다면 이러한 모순된 엉터리 주장이 되어 버린다. 하나님 아버지의 편지에는 분명히 한곳으로 명시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녀들이 잘못 해석하여 여러 곳으로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편지의 해석은 절대로 있을 수 없듯이 성경의 해석은 절대로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또 하나들어 보자. 오늘날 전 세계의 신학계와 교계에서 “성경은 침례로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이어야 한다. 아니다. 성경은 침례가 아니고 뿌리는 세례이다”라고 서로 다르게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해석 논쟁으로 인하여 기독교 내에 침례교파가 생겨났다. 성경에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논쟁하도록 기록되었다고 한다면 진리의 책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간단 명료하게 기록되어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K목사는 A라는 신자에게 'baptize'는 'immerse'의 뜻이니 물속에 들어가서 받으라. P목사는 A라는 신자에게 'baptize'는 물속에 안 들어가고 뿌림(sprinkle)으로만 해도 된다고 하였다. A라는 신자가 이 두 목사의 말을 듣고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를 몰라서 고민하게 되었다. 성경에 이렇게 고민하며 망설이도록 절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학자들이 신약에 나오는 헬라어 'baptize'라는 뜻을 성경 안에서 잘못 해석한 데서 온 그릇된 논쟁이다. 성경은 이 단어의 뜻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어 논쟁하도록 기록되지 않았다. 양자택일의 논리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복음전도의 출발에 앞서서 성경의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의 중요성을 먼저 알아야 한다.

 

성경에 난해한 구절들이 있는데 왜 난해구절들이 있게 된 것일까?

 벧후 3:15-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Bear in mind that our Lord's patience means salvation, just as our dear brother Paul also wrote you with the wisdom that God gave him. He writes the same way in all his letters, speaking in them of these matters. His letters contain some things that are hard to understand, which ignorant and unstable people distort, as they do the other Scriptures, to their own destruction. (NIV)

 

이상의 기록 가운데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라는 말씀이 있다.  본 필자가 잘 아는 한 신학교 학장이 있는데 그분은 본 필자에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인데 해석이 불가능한 난해구절들이 반드시 있다고 하였다. 얼필 들으면 맞는 말 같으나 전혀 그릇된 말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기록은 하나님의 편지를 기록한 책으로 비유된다.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것도 대단히 학식이 많은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자녀들이 이해도 못하고 해석도 못하는 글을 써서 자녀들에게 보내는 아버지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식한 아버지이건 대학교육을 받지 아니한 아버지이건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는데 자녀들이 반드시 알 수 있도록 쓰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에게 쓴 편지인 성경을 해석하지 못하도록 쓰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따라서 신구약의 말씀을 해석이 불가능한 난해한 구절들은 절대로 존재하지 아니한다. 즉 근본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난해한 성경구절들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그렇다면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라는 말씀은 무슨 말인가? 이 말씀의 뜻을 밝혀내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예레미야 17: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약 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하나님께서는 이상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순종하지 아니하는가를 보시기 위하여 "알기 어려운 것을 더러" 두신 것이다. 신학들과 목사들이 성경을 읽고 연구하다가 난해구절을 만나면 하나님 아버지께 그 뜻을 묻지 않고 인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는 주석자, 설교자가 써 놓은 글, 인간이 만들어놓은 신학사전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것으로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경고를 주신 것이다. 한 마디로 표현하여 알기 어려운 난해구절을 두신 이유는 요일 2:27, 역대하 16:9, 예레미야 17:5, 약 1:5-8을 깨닫고 실천하는 자는 육의 눈과 영안을 열어 주셔서 모든 성경을 바로 해석하게 하시고 이 구절들을 의지하지 아니하면 멸망당하도록 버려두시기 위하여 난해구절들을 더러 두신 것이다. 난해구절들을 만나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 난해구절은 일체 없게 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예수님을 믿은 후, 중생한 후에 성령세례(성령충만)를 받으면 성령님이 주시는 지식과 지혜의 은사가 임하여 요일 2:27의 상태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을 위시하여 전세계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중생할 때 성령세례를 받는다고 주장하고 해석하고 있다. 성령론에 있어서만을 자기들만이 최고라고 자부하고 자처하고 있는 오순절교파에서도 중생할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하고 해석하는데 이는 전혀 비성경적인 것이다. 이러한 주장과 해석을 하여 성령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유명하다고 하는 목사들의 설교와 설교집과 신학서적에는 일체의 예외 없이 비 성경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경우에는 위에서 말씀하신 구절들에 전적으로 의지하지 아니하면 그도 역시 지식과 지혜의 문이 닫혀지게 되어 그릇된 번역과 그릇된 해석을 하게끔 운명지워져 있다.

 

장로교단과 오순절교단은 성령론의 문제로 인하여 계속하여 논쟁하고 있다.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NIV For we were all baptized by one Spirit into one body-whether Jews or Greeks, slave or free-and we were all given the one Spirit to drink.

 

    장로교단에서는 고전 12:13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니, 즉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으니,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고전 12:13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으니 이러한 해석과 주장은  전적으로 바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고전 12:13의 기록에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다”고 하였지만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말을 첨가하여 해석할 수가 있는가? 절대로 첨가하여 해석할 수 없다. 따라서 고전 12:13을 통하여 장로교단에서 주장하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교리를 확립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오순절교단에서는 “믿을 때 성령세례를 안 받은 사람도 있으니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장로교단과는 온전히 다르게 주장하고 있다.
    한국 오순절교단의 성령론 교리는 오류와 모순 속에 있기 때문에 한국의 오순절교리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미국 오순절교단에서는 120명의 제자들, 사마리아 신자들, 에베소 신자들을 예로 들어 “이들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했으니, 안 받은 신자들은 반드시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오순절과 비 오순절의 두 교단은 이상에서와 같이 완전히 반대되며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주장하고 있다. 이상의 두 주장은 분명히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완전히 상반되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성경에 근거한 주장이라면 성경에 이렇게 상반되며 모순되게 기록되었다는 말밖에 안 된다. 한편 두 교단에서는 자기들의 해석이 맞고 상대편의 해석이 틀린 것이라고 하여 맹렬한 비판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싸우도록 모순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논쟁하게 된 이유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은 두 사람의 실력에 월등한 차이가 나면 싸움은 절대로 계속될 수 없다.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은 실력이 같거나 비슷하다는 말이다. 필자는 두 교단의 성령론은 모두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장로교단과 오순절교단의 성령론의 논쟁은 현재 이 세상에 나와 있는 번역성경을 두 교단의 신학자들이 모두가 맞다고 무조건 믿는 데서 온 것이다. 즉 논쟁의 출발은 그릇된 번역을 맞다고 믿는 착각에서 온 것이다. 따라서 그릇된 번역을 바르게 고치면 논쟁은 간단 명료하게 끝나게 되어 있다. 신구약성경은 진리되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록한 편지이기 때문에 자녀들이 이렇게 논쟁하도록 절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바른 번역은 바른 해석을 가져오고 바른 해석은 논쟁을 절대로 야기시키지 않는다.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에 있어서 성경의 번역과 해석을 건축에 비유한다면 이는 건축의 설계도와 기초공사에 해당된다. 기초공사가 잘못된 건물은 삼풍백화점과 똑같이 반드시 붕괴되도록 운명 지워져있다.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의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성경의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이 없이는 복음전도와 교회성장은 반드시 무너져 내리며 하나님의 버림을 받도록 운명 지워져있다. 이는 기독교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사실이다.
    독일의 마틴 루터를 통한 종교개혁은 일단 성공했지만 그가 직접 번역하여 만든 독일어 번역성경(1522년 초벌 번역, 1543년 14회 교정 후에 출판)은 특히 성령론의 많은 부분에서 그릇 번역되어 있다. 그릇된 번역을 맞는 번역으로 믿고 착각하여 만든 성령론의 교리로 인하여 오늘날의 독일교회는 신자의 감소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편 마틴 루터의 번역성경을 바른 번역으로 믿고 이를 기초로 한 서양의 여러 나라의 모든 번역 성경과 영어성경 (1611년 KJV 출판)은 그릇 번역되어 역시 신자의 감소로 고전하고 있다. 감리교를 창시한 요한 웨슬러 자신은 성령세례(충만)를 받아 사역을 했으나 그는 그가 체험한 성령세례를 성경 안에서 이를 체계화 하는데 전혀 실패함으로 오늘날의 영국의 교회와 미국을 위시한 감리교단은 고전하고 있다. 필자의 주장대로 그릇 번역된 성경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서구의 소위 전통적 정통신학을 신봉하는 교단의 교회는 감소하지만 똑같은 성경을 사용하는 오순절교단은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어찌하여 필자가 두 교단의 성령론을 이렇게 비판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필자의 “성령론”의 저서에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아무튼 성경의 바른 번역과 바른 해석은 복음전도, 바른 목회, 교회성장, 바른 신앙생활의 생명임을 명심하고 복음사역에 임하는 목회자에게 성령님은 반드시 함께 역사해 주시어 교회를 성장시켜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