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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복음전도를 위하여 오시었다.
요 3:14-17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상의 기록에서 구원의 의미는 영혼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의미에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면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있다. 오늘날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구원”의 뜻을 모르면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베드로, 바울이 전한 구원의 복음을 그대로 전하면 교회는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고 신자들은 건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민 21:4-9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들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출애굽 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푼 기적을 무수히 체험하고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40년 동안 고난의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때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았다. 이때에 불 뱀이 백성들을 물어 그 독으로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는 방법으로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하시었는데,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 즉 살았다고 하였다. 불 뱀으로 죽게 된 원인은 하나님을 불신앙하고 원망함으로 하나님께 범죄함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죽음의 질병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다. 이 기록은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질병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기록으로 불 뱀의 독으로부터 치료함을 받은 현실적으로 사람의 눈에 보이는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의 성취였다.
    예수님께서 요 3:14-17에서 말씀하신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란 바로 구약의 사건을 해석하신 것이다. 요 3:14-1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모세가 든 막대기의 뱀을 본 사람은 육신의 치료를 받은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보고, 이를 믿으면 죽음에 이르는 육신의 질병에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영혼의 구원만이 아니라 영혼육의 전인적인 구원을 위하여 오시었다. 분명한 것은 죽음에 이르는 육신의 질병에서의 구원함을 받게 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은 오시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당시의 모세를 통하여 전하여지는 구원의 복음을 믿고 순종함으로 육신의 질병에서의 구원을 얻은 것처럼, 오늘날에도 목회자들을 통하여 전해지는 구원의 말씀을 믿고 순종함으로 육신의 질병에서의 구원도 반드시 이루어져야 바른 복음이다. 오늘날에도 주일예배 시는 물론이고 교회의 각종집회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죽음에 이르는 육신의 질병에서 치유의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면서 질병에서의 구원을 얻는 신자가 없다면 바른 복음이 절대로 아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죽으면 영혼이 구원을 얻어 천국에 간다는 것만이라는 복음 선포는 바른 복음의 선포가 절대로 아니다. 천국복음과 육신의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는 복음이 동시에 선포되고, 실제로 육신의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은 역사가 반드시 나타나야 바른 복음이다. 이상의 내용이 예수님께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는 말씀의 뜻이다. 예수님은 이상의 내용을 가르치시고 또한 몸소 이를 보여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직접 오시었던 것이다.

 

요삼 1:1-2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상의 기록은 “예수님은 영혼의 구원, 범사의 구원, 질병에서의 구원을 위하여 오시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예수님을 믿으면 지옥에 가게 될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며, 의식주를 위시한 범사에 있어서 잘되는 축복을 받으며, 모든 질병에서의 치유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이러한 구원의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은 오시었다. 질병의 치유가 없는 복음전도는 분명히 그릇된 복음전도이다. 오늘날 수많은 대형교회에서 질병의 치유를 강조하지 아니하고 질병의 치유가 전혀 없어도 많은 신자가 모이고 있는데 이것은 바른 복음의 전도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육신의 질병에서의 구원의 복음
마 9:20-22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눅 8:43-48  이에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루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막 5:24-3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쌔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 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이상에 기록에 나타난 구원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영혼의 구원을 절대로 의미하지 않다. 12년 동안의 혈루병에서의 구원, 질병에서의 치료함을 받는 구원이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이와 같은 질병에서의 구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 여자는 어떻게 하여 신유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는가?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바로 이러한 마음이 있었고, 예수님은 이 마음과 믿음을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었다. 예수님은 “겉옷만 만져도 낫겠다. 구원을 얻겠다는 마음을 일컬어 이를 믿음”이라고 하시었다. 오날에도 이 여자와 같은 마음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에게 나아오는 자는 치료 불가능한 질병을 반드시 치료함을 받게 하신다.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과 육신의 구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전인적인 구원이며, 예수님은 바로 이 전인적인 구원을 위하여 오시었고, 이를 당시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시었고, 오늘날의 제자 된 모든 목회자들에게 성경을 통하여 가르치고 계신다. 질병의 치료함을 받는 것은 분명한 복음이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같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의미에 맞도록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면 그 교회는 반드시 신자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다. 복음과 구원의 뜻도 모르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전인적 영혼육 곧 영혼의 구원과 육체의 질병에서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눅 8:49-50에 기록된 육신의 죽음에서의 구원의 복음
눅 8:49-50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 만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이상에 기록된 구원은 죽어 천국에 가는 영혼의 구원이 절대로 아니며, 죽은 육체가 무덤에 들어가서 썩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는 육체의 구원이다. 영혼의 구원이 중요하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른 복음이 절대로 아니다. 영혼구원에 대한 확신은 육신의 구원, 즉 질병에서의 치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2,000년 전의 예수님이 오늘날에도 성령님으로 오시어 질병을 치유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어야 천국복음을 받아드리게 된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Good News)
롬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전 1:17-18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마 10:5-8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롬 1:16에서 바울의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The gospel is the power of God for the salvation of everyone who believes)는 말씀과 고전 1:18의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The message- logos-of the cross is the power of God to us who are being saved)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고전 1:18의 “십자가의 도”라는 번역은 정확한 뜻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며 바른 번역은 “십자가의 말씀 또는 십자가의 복음”이어야 한다. 롬 1:16과 고전 1:18의 말씀은 동일한 뜻을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기록된 복음이란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된다는 기록이다. 마 10:5-8에서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과 같이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면 반드시 병자가 치유되는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에 제자들에게 마 10:5-8에 기록된 대로 복음사역을 훈련시키시었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은 그들이 훈련받은 그대로 복음을 전하였다. 현대의 복음사역자들이 마 10:5-8에 기록된 대로 병자가 치유되는 권능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서 말만의 설교를 복음이라고 하여 말만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께서 맡기신 복음사역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롬 1:16, 고전 1:17-18, 마 10:5-8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복음의 진리는 “권능의 나타남이 없이 말만의 설교는 복음이 절대로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권능, 성령님의 권능으로 질병의 치유의 기적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눅 4:18-19에 기록된 복음의 의미
눅 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이상의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to preach the good news to the poor),
*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to proclaim freedom for the prisoners),
*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시려고(recovery of sight for the blind),
*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to release the oppressed),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려고(to proclaim the year of the Lord's favor),
 
눅 4:18-19에 대한 방동섭 목사의 해석
눅 4:18-19에서 누가는 예수님의 사역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포의 사역’ 뿐 아니라 더 나아가 포로 된 자와 눌린 자와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사회 정의’를 이루는 사역,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는 ‘섬김의 사역’과 함께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특히 예수님이 이 세상의 가난한 자, 소외당하는 자, 압제당하는 자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시며, 그들의 영적, 사회적, 신체적 조건들의 결함을 회복시키는 디아코니아적 선교사역(섬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실천하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방동섭 목사, ‘선교없이 교회없습니다’ 2010, p.124. 총신대 및 동 대학원 졸업,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 칼빈신학교 졸업, 리폼드신학교 Ph.D. 백석대학교 교수 역임. LA 미주성산교회 목사)

 

눅 4:18-19은 눅 7:18-22에서 해석되고 있다.
눅 7:18-22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방동섭 목사는 눅 4:18-19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시려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의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은 이 세상의 가난한 자, 소외당하는 자, 압제당하는 자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사회정의’를 이루는 사역”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그릇된 해석이다. 눅 4:18-19의 해석은 눅 7:18-22의 예수님의 말씀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눅 4:18-19의 말씀과 눅 7:18-22에서 주님이 이 지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눅 4:18-19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 를 주시려고,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시려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는 말씀은 눅 7:18-22에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포로 된 자, 눌린 자란 방동섭 목사가 말하는 대로 소외당하는 자, 압제당하는 자를 의미하지 않고 바로 마귀에게 포로 된 자, 마귀에게 눌린 자를 의미하고 있다. 또한 눅 4:18-19에서 가난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를 의미하지 않고 포로 된 자, 눌린 자, 눈먼 자를 의미하며, 눅 7:18-22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시어 마귀의 병마에 고생하는 병자들을 일컫어 가난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곧 마귀에게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마귀로 인해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주시려고, 마귀에게 눌린 자를 자유케 하여 질병에 고통당하는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병든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눅 4:18-19에 기록된 사역을 위하여 오시었고 바로 이 내용을 한마디로 복음(good news)이라 표현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지옥에 가게 될 자를 천국으로 인도하기기 위하여 오시었으며, 이 세상에 사는 가난한 자 곧 마귀에게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해방시키어 고치시기 위하여 오시었다. 질병에 고통당하는 자에게 복음이란 바로 질병을 치료해주는 것이다.

 

눅 4:25-27에 기록된 복음의 의미
눅 4:25-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큰 흉년으로 기근이 들어 죽게 된 사렙다의 과부에게 “하나님을 믿다가 죽으면 천국가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엘리야가 설교를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먹을 것이 없어 죽게 된 그녀와 외아들에게 먹을 것을 줌으로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엘리사를 찾아 온 이방나라의 문둥병자인 나아만 장군에게 엘리사는 “문둥병이 걸렸지만 하나님을 믿으면 죽어 천국 가는 축복을 받는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으라”고 설교하지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문둥병이 낫는다고 하여 문둥병을 치료해주었다. 열왕기하 5:14- 15에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 아이의 살 같이 깨끗하게 되었더라.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나아만 장군이 그의 문둥병을 치료함 받고 이스라엘 외에는 참 신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는 문둥병의 치료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복음이란 말만을 가지고 “죽어 천국가는 것” 만을 일러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해결 불가능한 현실적인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해결받는 것이다.
    나아만 장군의 실례는 “영혼구원을 위한 전제 조건은 육신의 질병의 구원이다. 즉 육신의 구원, 육신의 질병의 치유는 바로 영혼구원으로 직결 된다”는 사실을 밝혀주는 기록이다. 예수님은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시었다. 오늘날의 사역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복음”의 뜻을 바로 깨닫고 예수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요 4:46-53에 기록된 복음의 의미
요 4:46-53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저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상의 기록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 하리라”라고 하셨다. 표적과 기사를 통한 병 고침을 보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만 복음을 전하면 믿지 않는다고 강조하여 말씀하시었다. 그리하여 병자를 치료해줌으로 “그 온 집안이 다 믿게 되었다”고 하였다. 예수님 조차도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셨는데 오늘날의 사역자들이 신유의 기적이 없이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고 있다. 말만 가지고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이 절대로 아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마 12:38-40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고전 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김의환 목사의 고전 1:22-24의 해석
예수님은 이적을 찾는 무리들에게 요나의 이적 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요나의 이적은 곧 그리스도 십자가의 예표적 사건이다. 바울도 이적만 찾는 믿음은 저급한 것으로 여겼다(고전 1:22-23). (김의환 목사 ‘성경적 축복관’ p.66) 
 
    이상의 기록 가운데 “바울도 이적만 찾는 믿음을 저급한 것으로 여겼다”(고전 1:22-23) 는 해석은 전혀 그릇된 자의적인 해석이다. 고전 1:22-24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을 “바울도 이적만 찾는 믿음을 저급한 것으로 여겼다”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그릇된 해석이다.
    요 4:46-53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마 12:38-40에는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기록 되어 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두 말씀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절대로 서로 다른 상반되는 기록이 아니다. 그 동안 예수님이 수 없이 보여주신 표적과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은 메시야 되심을 증거하시였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삼일 만에 부활하시어 메시야 됨을 증거하시겠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고전 1:22-24에서 바울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의 경우와 같이 표적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고, 한편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고 이지적인 지혜를 통하여 믿는 헬라인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유대인들과 같이 표적을 통해서 믿는 자들에게는 표적을 통하여, 지혜로운 설교를 통하여 믿으려고 하는 헬라인들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지혜로운 설교를 통하여 주님을 증거하여 믿게 만들었다. 예수님 당시나 사도 바울의 당시와 같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반드시 존재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말씀과 신유의 표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5:17-19에서 “말과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복음을 편만하게 즉 완전하게 전하였다”고 하여 이를 확증하고 있다.

 

막 16:15-20에 기록된 복음의 의미
막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오늘날 외국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건 국내의 목회자들이건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복음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도 않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 예수님, 베드로, 바울조차도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즉 성령님의 권능을 받고 복음사역에 임했는데, 성령세례가 무엇인지도 모르며 받지도 않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 이는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와 바울과 같이 먼저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이렇게 전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성장이 어렵고 신자가 모이지 아니하여 문 닫는 교회가 허다하다. 오직 성경의 교과서대로만 복음을 전하면 교회는 반드시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다. 성경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 롬 15:18-19, 고전 2:1-5에서 바울은 유창하고 지혜로운 말만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다고 확실히 증거하고 있다.

 

스탠저가 말하는 교회의 사명
교회는 예배, 복음 선포, 교육, 전도, 친교, 사회봉사 등 다양한 종류의 목회를 행하고 있다. 한편 치유목회 역시 교회의 태동기로부터 그 임무 가운데 하나가 되어 왔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 문제와 관련 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복음 선포와 교육과 치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세 가지 형태의 사역이었다. 이 가운데 치유는 그 분의 사역에서 결코 제외할 수 없는 핵심을 이루고 있었으며, 사도들 역시 이 일을 이어 받아 실천에 옮겼다.” 예수께서 당신의 교회에 내리신 지상명령의 내용은 “가서 가르치라. 가서 복음을 전하라. 가서 치유하라”는 3중적인 것이었다. (배상길 목사 번역, Frank Bateman Stanger ‘위대한 의사 예수’ [God's Healing Community] p.31) 

 

    현대교회에서 “예배, 복음 선포, 교육, 전도, 선교, 친교, 사회봉사”등 다양한 종류의 사역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교회에서 신유사역을 목회사역의 중요한 부분으로 채택하여 행하는 교회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한국의 성결교단에서는 교단의 4대강령으로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내세우지만 실제로 신유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결코 없다. 스탠저와 바클레이의 위의 기록 가운데 “복음 선포와 교육과 치유는 예수께서 행하신 세 가지 형태의 사역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맞는 말이지만 정확한 해석은 성경에 나오는 “복음”이라는 말 속에 “치유”가 포함되는 것으로서 치유를 통한 복음전파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여 치유가 없는 말로만의 복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복음사역과 예수님께 삼년동안의 복음사역을 교육받은 제자들의 복음사역은 병자의 치유를 통한 복음전파였다. 즉 신유가 없이 전하는 복음전파는 절름발이의 사역이며 신유가 없는 복음전도는 성경을 잘못 연구한 데서 온 것으로 전혀 비 성경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