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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바울은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함이라”라고 하였다. 현대교회에서 목사들의 유창한 말만의 설교, 인간적인 지혜를 동원한 설교는 있어도 성령님의 권능의 나타남(신유와 표적과 기사와 이적)은 일체 없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에서의 설교는 오직 유창한 말만의 설교뿐이다. 이는 롬 15:15-19, 고전 1:17, 고전 2:1-5에 전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왜 바울 사도가 고전 2:1-5에서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는 말을 했는가? 오늘날 신학교에서 설교학 강좌는 있어도 바울의 이 말에 대한 강좌는 일체 없다. 성령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고 지혜로운 말만의 설교는 주님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신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여 바울은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하였다. 동서양의 현대교회에서 설교 중에, 또는 부흥집회 중에 신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고 유창한 말만의 설교로 그친다면 이는 성경말씀 곧 롬 15:15-19, 고전 1:17, 고전 2:1-5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직 성경만이 복음전도의 교과서이며 교회성장학의  유일무이한 교과서이다. 소위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나 부흥사들이나 목회자들이 저술한 복음전도학, 교회성장학은 신학생과 목회자들의 참고서는 될지언정 교과서는 될 수 없다. 오늘날에도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바울 사도와 같이 복음을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전도가 절대로 아니다. 이 세상에는 신유를 포함한 표적과 기사의 능력 곧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이 없이도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가 분명히 많이 있다. 신자가 많이 모이는 교회라고 하여 반드시 성경에 기록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신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지 않고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가 결코 아니며, 롬 15:15-19에 기록된 “이 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전파하였다”는 말에 해당되는 교회가 아니며, 고전 1:17과 고전 2:1-5에 기록된 말씀에 위배되는 교회일뿐이다. 또한 막 16:20의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는 기록과 같이 표적이 없이 말만의 복음전도는 말씀을 확실히 증거한 것이 결코 아니다.

 

박형용 목사의 고전 2:1-5에 대한 해석
고전 2:1-5의 구절에 나오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에 대하여 박형용 목사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바울은 이때 고린도에서 심각한 정신적 고심을 감수한 것으로 믿어진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려워 떨었지만 환상을 통해 주님의 격려를 받았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 18:9,10).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동안 자신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고백한다(고전 2:1-5).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에 설립한 위대한 교회는 많은 해산의 진통을 통해 태어나게 된 것이다(고전 4:15). 이런 고난은 계속 되었다. 그의 서신서들이 증거한대로 바울은 그 다음 수개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며 고린도교회를 위해 수고했다. (박형용 목사, ‘사도행전 주해’ p.214)  

 

    고전 2:1-5의 기록 가운데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에 대하여 박형용 목사는 “바울은 이때 고린도에서 심각한 정신적 고심을 감수한 것으로 믿어진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려워 떨었지만 환상을 통해 주님의 격려를 받았다. 바울이 고린도에 설립한 위대한 교회는 많은 해산의 진통을 통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고난은 계속 되었다. 바울은 그 다음 수개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며 고린도 교회를 위해 수고했다”라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롬 15:15-19, 고전 1:17, 고전 2:1-5를 같이 놓고 연결시켜 해석해야 한다. 바울은 고전 1:17에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 하였고, 롬 15:18-19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 즉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편만하게 완전하게 전하였다”고 하였고, 고전 2:1-5에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상에서 바울은 유창하고 지혜로운 말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와 상관이 없기 때문에, 즉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은 복음전도가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즉 신유를 포함하여 표적과 기사 곧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 없이는 복음전도는 헛 것이 되기 때문에, 바울은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아니할까 하여,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낭패를 당하기 때문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라고 했던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는 비록 고린도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바울은 이때 고린도에서 심각한 정신적 고심을 감수한 것으로 믿어진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두려워 떨었지만 환상을 통해 주님의 격려를 받았다. 바울이 고린도에 설립한 위대한 교회는 많은 해산의 진통을 통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고난은 계속 되었다. 바울은 그 다음 수개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며 고린도 교회를 위해 수고했다”라고 해석한 것은 전혀 그릇된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교회의 거의 모든 목사들이 ‘설교를 잘해야 교인들이 모이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설교를 잘못하면 어쩌나 하여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간증과 이러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바울의 생각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라고 하여 신유를 포함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지 아니하면 어쩌나 하여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하였다. 롬 15:15-19, 고전 1:17, 고전 2:1-5의 기록은 현대교회 나아가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존재하게 될 교회의 복음전도와 선교의 핵심이 되는 기본 교리이다.

 

예수님에게 큰 무리가 몰려든 이유가 복음전도의 핵심이다.
마 4:23-25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 질병)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막 6:12-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이상에서 “예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고 하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경우에 말만의 천국복음은 있고, 치유는 없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주님과 제자들은 복음전파를 하면서 반드시 동시에 치유사역을 행하시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 말만의 복음 설교는 있으나 치유는 일체 없으면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라고 하는데 이러한 주장은 전혀 비 성경적인 것이다.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왜 이렇게 많은 무리가 모여들게 되었는가? 신유의 사역을 하심으로 많은 무리가 모여들었다고 하였다. 여기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의 전도는 교육과 천국복음과 병 고침을 통하여 이루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복음사역에서 ‘병 고침의 사역은 일체 없고, 오직 말로만의 교육과 말로만의 천국 복음전도 사역’으로 사역을 하면서 예수님의 방법대로 사역한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역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역일 뿐이다.
    조용기 목사는 “예수님의 복음전도 사역 중에서 3분의 2가 신유사역이었다”('오중복음과 삼박자 축복' p.173)고 주장하는데 이는 맞는 것 같으나 그릇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복음사역 안에 신유사역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사역과 신유사역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복음이란 말 자체가 신유의 복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지만 신유의 복음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예수님의 복음전도사역 중에서 3분의 2가 신유사역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신유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 복음은 복음이 결코 아니다. 바로 이 사실을 위의 성경기록이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보여 주신 그대로, 행하신 그대로 예수님과 같이 복음사역을 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 된 목회자들이 스승되시는 예수님의 방법대로 복음사역에 임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의 소문이 온 땅에 퍼지니라.”
마 9:19-26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어 보내신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막 1:21-28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으로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왜 소문이 온 땅에 퍼졌는가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낫게 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기적을 행하시는 신유사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에게 큰 무리가 모여드니라.”
마 15:29-3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막 1:29-33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저물어 해 질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무엇 때문에 큰 무리가 모였는가의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낫게 하시었기 때문이다.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인 것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고,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고 하여 "모든 병든자들이 치유받기 위하였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복음사역은 오늘날에도 반드시 재현되어야 한다.

 

“그 사람이 나가서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라.”
막 1:39-45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그 사람이 나가서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한 사람만의 육의 질병으로부터 구원시키면 교회가 자동적으로 개척되고 사람이 몰려들어 교회는 커지게 되어 있다. 오늘날 한 사람도 성경의 기록대로 질병에서 구원을 못시키고 있으니 목회하기가 형극의 길이 되고 있다. 병자를 한 사람도 구원을 시키지 못한다면 절대로 교회를 시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병든 자 한 사람을 구원시키면 교회는 자동적으로 개척되며 교회는 커지게 되어 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다. 죽어서 천국가는 것만을 구원이라고 잘못 배우고 잘못 가르치고 있으니 사람이 안 모이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영혼의 구원, 육신의 질병에서의 구원, 의식주에서의 구원, 그리고 육체의 죽음에서의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오직 영혼구원만을 가르치며, 기독교의 도덕윤리 중심의 설교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오지 않는다. 영혼구원의 설교만을 잘해도 신자가 몰려드는 교회는 참다운 교회가 아니다. 왜 참다운 교회가 아니냐 하면 고전 1:17의 기록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김의환 목사의 주장
예수님은 한번도 오늘날의 일부 치병을 내세우는 부흥사들처럼 병 고치는 것을 내세우는 집회를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찾아오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널리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김의환 목사, ‘성경적 축복관’ p.68)

 

    이상의 “예수님은 한번도 오늘날의 일부 치병을 내세우는 부흥사들처럼 병 고치는 것을 내세우는 집회를 하지 않으셨다”는 주장을 얼핏 보면 맞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그릇된 주장이라는 사실이 아래의 성경기록이 증명하고 있다.

 

요 6:1-2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눅 5: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막 3:7-8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좇으며,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허다한 무리가 그의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눅 12:1 그 동안에 무리 수 만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이상의 기록에서 보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질병의 치유”의 두 가지로 구분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하나가 되어 복음을 전하시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일부 치병을 내세우는 부흥사들처럼 병 고치는 것을 내세우는 집회를 할 필요가 없으셨다. 예수님의 복음전도는 그 자체가 질병의 치유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질병의 치유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시었고 복음전도를 통하여 치유사역이 이루어진 양자가 혼연일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흥집회, 사경회, 교회의 각종 집회 시에 오직 말씀만 있고 병자의 치유는 전혀 없다. 따라서 신유은사가 나타나는 부흥사는 이를 선전하여 병자들을 오게 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께서 질병치유를 소문내지 말라고 당부 하셔도 병을 치유 받은 자들과 그들의 일가 친척과 친지들이 소문에 소문을 내어 예수님 앞에 허다한 무리가 모인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 처럼 사람들이 말씀도 듣고 치유도 받기 위하여, 또한 치유를 받고 말씀도 듣기 위하여 오게 될 때 이것이 바른 복음전도이다. 예수님의 복음사역은 오늘날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계속하여 이루어야할 전형적인 모형이다. 

 

눅 21:37-38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 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눅 21:37-38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모든 백성은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는 기록에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말씀만을 가르치시고 백성은 말씀만을 들으러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눅 6:17의 “예수께서 저희와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의 기록이 생략된 것이다. 눅 21:37-38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마 9:35, 눅 5:15, 6:17, 요 6:1-2을 동시에 연구해야 한다.

 

행 28:16,23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은 자기를 지키는 한 군사와 함께 따로 있게 허락 하더라.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행 19:8-12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 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행 28:16,23의 “로마에 간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라는 기록에 의하면 바울이 말씀만을 가지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롬 28:16,23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행 19:8-12과 고전 1:17 그리고 고전 2:1-5를 동시에 놓고 해석해야 한다. 로마에 간 바울은 말만 가지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바울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말만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신유를 포함한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했다. 행 28:16,23은 행 19:8-12과 고전 1:17 그리고 고전 2:1-5의 기록이 생략된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생략법
마 14:17-21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막 6:41-44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 앞에 놓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 며 떡을 먹은 남자가 오천 명이었더라.
요 6:9-10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 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마 14:17-21의 기록에는 5병2어로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막 6:41-44에는 5병2어로 “남자가 오천명”으로, 요 6:9-10에는 5병2어로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으로 기록되어 있다. 요 6:9-10의 기록에는 마 14:17-21와 막 6:41-44의 기록에 나오는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 남자만”이라는 기록이 생략된 것이다. 이와 같이 눅 21:37-38에는 마 9:35과 눅 6:17에 기록된 “병고침”을 생략하고 기록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모순이 생기지 아니한다.

 

예수님의 명령: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눅 8:36-39  귀신 들렸던 자의 어떻게 구원 받은 것을 본 자들이 저희에게 이르매 거라사인의 땅 근방 모든 백성이 크게 두려워하여 떠나가시기를 구하더라. 예수께서 배에 올라 돌아가실쌔 귀신나간 사람이 함께 있기를 구하였으나 예수께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 하시니, 저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치유해주시면서 “저를 보내시며 가라사대 집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네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일일이 고하라”고 하시었다. 이 말씀은 치유를 소문내라는 말씀과 전혀 동일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래의 기록에서는 소문내지 말라고 하시었다.
막 3:9-12  예수께서 무리의 에워싸 미는 것을 면키 위하여 작은 배를 등대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에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핍근히 함이더라.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 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
막 7:24,36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하나 숨길 수 없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막 1:40-45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 진지라. 엄히 경계하사 곧 보내시며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눅 21:37-38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왜 예수님께서 치유에 대하여 소문내지 말라고 하시었는가?
    김의환 목사는 예수님은 찾아오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널리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오늘날의 치유 사역자들은 왜 소문을 내느냐고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예수님은 눅 8:36- 39에서는 소문을 내라고 하시었다. 그런데 막 3:9-12과 막 7:24,36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고 하시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막 1:40-45과 눅 21:37-38에서 밝히고 있다. 즉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라고 하였다. 동네에 들어 가셔서 밥을 먹을 수도 , 쉴 수도, 밤에 잠을 잘 수도 없게끔 많은 병자들과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에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김의환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찾아오는 병자를 고쳐 주셨고 널리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는데 오늘날의 치유 사역자들은 왜 소문을 내느냐”고 반론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부흥집회, 교회의 각종 집회시에 오직 말씀만 있고 병자의 치유는 전혀 없다. 이는 전혀 비 성경적인 것이다. 눅 8:36-39의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하신 것을 온 성내에 전파하니라”는 대로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치유사역을 통하여 복음전도를 하신다는 사실이 만방에 선포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