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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그 그래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던(사 53:3,4) 분이다. 그 분은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하나가 되게 하시려고 자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 주셨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그 분은 우리를 모든 두려움에서 건지시리라고 약속하셨다(시 34:4). (2001년 4월호 ‘생명의 길’에서 인용, LA 생명의 길 선교회 발행)


성경에서 마음이 상한 자란 질병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자이다.
사 53:3-5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NIV He was despised and rejected by men, a man of sorrows, and familiar with suffering. Like one from whom men hide their faces he was despised, and we esteemed him not. Surely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sorrows, yet we considered him stricken by God, smitten by him, and afflicted.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신 것’(사 53:3,4)이라는 말씀 가운데에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던 분”을 바르게 해석해야 ‘마음이 상한 자’라는 뜻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슬픔”은 “상한 마음”이며, 슬픔 곧 상한 마음은 질고, 곧 질병(infirmities)에서 왔다는 기록이다. 슬픔 곧 상한 심령은 질병에서 온 것임으로 질병이 치유되면 상한 심령은 자동적으로 치유되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 사 53:3-5에서의 ‘상한 심령’이란 질병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이 ‘상한 심령’의 치유란 반드시 질병의 치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를 통하여 육체의 질병의 치유는 일체 없으면서 상한 심령을 치유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따라서 육체의 질병의 치유 없이 상한 심령의 치유를 위하여 내적 치유를 하고 있다는 것은 황당한 그릇된 주장이다.

 

더그 그래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의 감정을 치유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망은 예수님의 사역과 생애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문등병자들이나 죄인, 부정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대하실 때 육체의 질병뿐 아니라 감정적인 상처들도 치유해 주셨던 것을 볼 수 있다. 문등병자는 다른 사람들이 가까이 있을 때 부정하다고 외침으로 다른 사람이 근접치 못하도록하였으며, 그로 인한 감정적 상처는 분명 육체적 아픔만큼 심했을 것이다. 문둥병자는 부정한 자로 간주되어 버림받음, 거부, 미움, 분노, 조롱, 학대 등을 견뎌야만 했으므로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증오, 열등의식, 절망 그리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향한 깊은 분노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문등병자들의 육체뿐 아니라 깊은 내면의 상처들도 치유하기 원하셨기 때문에 그를 만져 낫게 하시고 제사장에게 보내어 그 병이 치유된 것을 증명하게 하심으로 앞으로 사회생활에 온전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신 것이다(막 1:40-45). 누가복음 17장에는 열 명의 문등병자들이 깨끗함을 받았는데 그 중 한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자신이 치유 된 것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그의 치료가 육신적 치료 이상이었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고 친밀한 음성을 들려 주셨다. 육신적 정서적 치유의 목적은 단지 우리가 건강을 되찾고 기분이 나아지게 하려는 것뿐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그 능력의 예수님과 평생토록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려는데 있다.(2001년 4월호 ‘생명의 길’에서 인용, LA 생명의 길 선교회 발행)

 

    이상의 주장에는 성경적인 것과 비 성경적인 것이 섞여있다. 문둥병자의 육체의 병을 치료해주면 마음의 상처들은 자연히 자동적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문둥병자의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 없이 마음의 치유를 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둥병자의 외적 치유 없이 내적 치유를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육체적인 질병은 없지만 마음 속에 내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바른 말이다. 그러나 육체적인 질병은 없지만 내적인 질병이 있으므로 이러한 사람에게는 내적 치유사역이 필요하다는 것은 성경 밖의 소위 병상심리학자들과 정신과 의사들의 주장으로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더그 그래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병들어 죽어가는 아이로의 무남독녀를 고치러 가시는 길에,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 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막 5:25-26) 한 여인을 만나게 되셨다. 그 여인은 계속 하혈을 하여 부정하게 여김을 받고 있었는데 오랜 병치레로 인해 육체적, 경제적으로 몹시 곤란했을 뿐 아니라 소외감, 분노, 거부, 조롱, 절망 등으로 감정적인 상처 또한 상당히 깊었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많은 무리 가운데 섞여 확신에 차서 담대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으며 그 순간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병 자체는 치료되었지만 좀 더 깊은 치유는 그 다음 순간 찾아왔다.(2001년 4월호 ‘생명의 길’에서 인용, LA 생명의 길 선교회 발행) 

 

    이상에서 “그녀의 병 자체는 치료되었지만 좀 더 깊은 치유는 그 다음 순간 찾아왔다”는 주장은 전혀 그릇된 해석에서 온 것이다. 혈루병 여인의 경우에 그녀가 겪었을 소외감, 분노, 거부, 조롱, 절망 등의 감정적인 상처는 육체적 질병인 혈루병에서 온 것이었기에 혈루병의 치료와 동시에 이 모든 내적인 감정은 온전히 치유 받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혈류병의 여자의 경우에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가 없는 상한 감정의 치유, 내적 치유란 존재할 수 없다. 여기의 기록을 통해서도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는 일체 없으면서 내적인 치유사역을 한다고 하는 것은 마귀가 주장하는 황당한 그릇된 것이다. 또한 더그 그래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이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다급한 순간에 왜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 여인을 찾으셨던 것일까? 바로 그 여인에게 온전한 치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함께 따르던 무리들은 왜 예수님이 이 여인을 찾으시는지 궁금해 하며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불평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녀에게 온전한 관심을 쏟으셨다. 먼저 주님은 그 여인에게 방금 일어난 일들을 진술하게 하심으로(33절) 주께서 그녀가 옷을 만진 행동을 받으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녀가 나음을 얻게 된 이유를 설명해 주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34절), 예수님은 그녀가 나은 것이 마술이 아니며, 또한 그녀 자신의 능력이나 주님의 옷자락 때문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다. 주님은 그녀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도록 하셔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한 결과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삶속에 넘쳐흐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녀를 치유하시고 확신시키시면서 사회로 복귀하게 해주시고 소외감과 경제적 압박, 의원들로부터 받은 상처 그리고 불치병으로 말미암은 낙담과 절망의 결박들을 모두 풀어주셨다.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절). 이와 같이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와 감정 모두를 치유하시는데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2001년 4월호 ‘생명의 길’에서 인용, LA 생명의 길 선교회 발행)

 

     “감정치유”라는 말은 일반 불신사회에서 사용한 말을 성경에 붙인 것이다. 소위 현대교회의 치유사역자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는 일체 없고, 내적인 치유, 감정 치유, 전인치유, 영적 치유의 사역을 한다는 것은 성경에서 전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질병의 범위를 육체의 질병에 국한하지 않고, 마음의 병, 영혼의 병까지 포함하여 육체의 질병은 치료하지 못하지만 마음의 치유, 내적 치유, 영혼의 치유를 하고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여 마치 성경에 기록된 신유의 은사를 받는 것처럼 행하고 있는데 이는 마귀의 속임수이다. 성령세례(성령님의 권능충만), 신유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역자들을 통하여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늘날 사역자들이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는 일체 없고, 유창한 설교를 통하여, 목회상담을 통하여 상처받은 마음이 위로를 받고, 마음의 상처를 고치는 것을 치유사역이라고 하는데 이는 말이 안 된다. 

 

조용기 목사의 주장: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의 치료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는 철폐되었고 우리에게 구원이 임했습니다. 이 구원은 죄를 용서 받고, 질병에서 놓임 받고, 범사에 강건하게 되는 우리의 영, 혼, 육 전체의 구원입니다. 구원의 메시지는 항상 신유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기 위해 신유가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신유는 전인 구원의 요소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영혼 구원만을 위한 것이 아닌 전인 구원을 위한 것이므로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치료자이십니다. (조용기 목사, ‘오중복음 이야기’ p.235)

 

    이상의 조용기 목사의 주장을 얼핏 보면 맞는 것 같으나 그릇된 것이다. “예수님은 영혼과 육체의 영원한 치료자이십니다”라고 하는데 이는 맞는 말인 것 같으나 문제를 야기시키는 말이다. 이러한 영혼과 육체의 치료라는 주장에 근거하여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현대교회에서 육체적인 치료는 일체 없으면서 설교를 통하여 영혼의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즉 영혼의 치료라는 말은 육체의 질병의 치유는 없지만 영혼의 치유사역은 행하고 있다고 그릇 주장하게 한 원인을 제공하는 말이다. 따라서 영혼의 치유라는 말은 적절한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며 성경에 기록된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를 혼동하게 만들며 오도하는 말이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영혼의 질병
한 중풍병자를 네 명의 친구들이 지붕을 뜯고 달아 내린 후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간구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는 충격적인 선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영혼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 ‘야고보서 강해’ p.130)

 

막 2:1-12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 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쌔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조용기 목사는 이상의 막 2:1-12에 나오는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의 구절을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영혼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즉,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영혼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막 2:1-12의 기록에는 일체 없다. 잠 30:5-6에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 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막 2:1-12의 기록에 없는 “영혼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말을 자의적으로 첨가하여 거짓 말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조용기 목사가 “예수님은 영혼의 치료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영혼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성경의 근거는 일체 없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중풍병은 죄에서 왔음으로 중풍병의 치유를 위하여 죄를 사해주시어 치료가 되게 해주시겠다는 뜻이다. 이 중풍병자의 영혼이 병든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육체에 중풍병이 온 것이라는 말씀이다.

 

임종달 목사가 말하는 질병의 종류
(1) 육신의 질병(문둥병 왕하 5:25, 열명의 문둥병자 눅 17:11-19, 중풍병자: 마 9: 1-8), (2) 마음의 질병(바디메오 마 20:29-34, 혈루병 앓은 여자 마 9:18-22, 두 소경 마 9:27-29), (3) 영혼의 질병(마 12:28, 행 10:38), (4) 생활의 질병(가난 시 82:3, 사르밧 과부 왕상 17:9-16, 선지자 생도의 아내 왕하 4:1-7). 30년간 나는 여의도순복 음교회 조용기 목사 밑에서 사역했고, 조용기 목사의 제자입니다. (임종달 목사, 1998년 5월 4일 여의도순복음교회 평신도성령학교의 강의안에서 발췌, 순복음전주교회 담임목사)

 

    이상의 “육신의 질병”(문둥병 왕하 5:25, 열명의 문둥병자 눅 17:11-19, 중풍병자: 마 9:1-8)의 주장 이외의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 생활의 질병의 설명은 전혀 그릇된 자의적인 주장이다. 소경 바디메오의 질병은 육신의 질병이며, 혈루병 앓은 여자의 질병도 육신의 질병이며, 두 소경의 질병도 육신의 질병이다. 임종달 목사는 마 12:22-28의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의 기록을 육신의 질병이 아닌 영혼의 질병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이는 분명히 육신의 질병이다. 눈멀고 벙어리 된 자의 질병을 영혼의 질병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성경적인 근거는 일체 없다. 이렇게 그릇 주장하게 된 이유는 임종달 목사의 스승인 조용기 목사가 주장하는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의 육신의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영혼의 병을 고쳐주셨던 것입니다”라는 그릇된 것을 수용하였기 때문에 생긴 자의적인 주장이다. 한국의 성령운동의 본산이라고 하는 조용기 목사를 위시한 순복음교회의 목사들의 성령론과 신유론은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경을 자의적으로 그릇 해석하여 그릇 가르치고 있으니 성경에 기록된 성령운동과 은사운동이 한국에서 전혀 오도되고 있다.


명성훈 목사가 말하는 신유
신유의 은사는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사회적, 인간관계의 질병도 고치는데 사용되어집니다. (명성훈 목사, ‘성령과 함께’ p.147)

 

안영복 목사가 말하는 신유
병고치는 은사(신유의 은사)는 꼭 육체적인 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병이나 정서적 병을 고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안영복 목사, ‘성령론 어떻게 연구할까’ p.71)

 

마원석 목사가 말하는 신유
병고치는 은사는 단순히 육신이나 정신적인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범주를 넘어 사회 악이나 환경, 인간관계에도 하나님의 치유 권능을 적용해야 한다. (마원석 목사, 여의도 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 제6회 국제학술세미나의 논문 ‘사회적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 1977, p.173)

 

이필재 목사가 말하는 치유
이민사회는 스트레스가 많다. 목사와 만나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일어난다. 목회는 곧 심방이라고 생각하며 힘들어도 열심히 심방을 해나갔다. 세계목회지도력 개발원(원장 박조준 목사)이 주최한 세미나 2008년 3월 10일 뉴욕신광교회(한재홍 목사)에서 발표한 이필재 목사의 주제발표 ‘교회성장의 비결이라면 설교와 심방입니 다.’ (2008년 3월 12일 LA 크리스찬투데이)

 

    이상에서 병고치는 은사(신유의 은사)는 육체적인 병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나 정서적인 것, 사회적, 인간 관계의 것까지로 확대시켜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유의 확대개념은 커다란 문제를 야기시키게 된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에서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는 일체 없으면서 목회자들이 설교를 통하여, 상담을 통하여 스트레스, 정신적인 병이나 정서적 병, 감정적인 내적인 병을 고친다고 하여 “나는 육체적인 외적 질병의 치유의 은사는 받지 못했지만 내적인 질병을 치유하는 은사는 받았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이렇게 비 성경적인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병고치는 은사(신유의 은사)를 육체적인 병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면, 정서적인 문제, 스트레스의 해소까지로 확대하여 적용시켰기 때문이다. 고전 12:7-10에 나오는 성령(님)의 9가지 은사들 중에서 신유의 은사는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은사이다. 성령세례(충만)를 통해 성령님의 권능을 받지도 않고 성령님의 은사도 받지 아니하여 육체의 질병에 대한 치유는 일체 없이 설교, 목회상담, 심방을 통하여 내적 치유사역을 하고 있다는 그릇된 주장을 하고 있다.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마음의 병
인간에게는 육체의 병 이외에도 보이지 아니하면서도 인간의 생명을 도적질하고 죽이며 멸망시키는 병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병입니다(잠 4:23,17:22). (조용기 목사, ‘무엇을 고민하십니까?’ 1995, p.199) 

 
    조용기 목사는 여기에서 잠 4:23, 잠 17:22를 근거로 하여 “육체의 병 이외에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병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잠 4:23, 잠 17:22의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의 기록을 마음의 병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구절에는 일체 없다. 여기에서 “마음의 병”이란 말은 철저한 자의적이 주장이다. 조용기 목사의 그릇된 주장을 그의 제자인 임종달 목사는 그대로 수용하여 소경 바디메오(마 20:29-34), 혈루병 앓은 여자(마 9:18-22), 두 소경(마 9:27-29)의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마음의 질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 생활의 질병”이라는 용어는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다. 육신의 질병의 치료는 일체 없으면서 “마음의 질병, 영혼의 질병, 생활의 질병은 치료한다”고 하는 것은 마귀에게 분명히 잡혀서 그렇게 주장하는 것으로 이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며 마귀의 속임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