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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계에서 마 28:18-19은 그릇 해석되어 그릇 시행되고 있다.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현대 신학계에서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이 구절을 그릇 해석하여 복음전도의 방향이 전혀 잘못 되어왔고 잘못 되어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예수님께 주셨으니”라는 말씀은 이 모든 권세를 제자들에게도 주신다(요 20:22-23; 눅 24:49; 행 1:5,8; 2:4)는 말씀이다. 오늘도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이 권세를 부여 받는다. 성령세례를 받지 아니했다면 이 권능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고,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물세례, 성령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난 후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의 순서이다. 현대 신학계에서 마 28:18-19를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여 가르치는 신학교 교수이든, 목사이든, 선교사, 전도사이든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고, 또 신자들로 하여금 받지도 못하게 하고 있다. 오직 “제자를 삼아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라는 데만 억매여 있을 뿐이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자가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말씀을 가르치고, 그리고 말씀을 배우는 신자들도 먼저 성령세례를 받고 난 후에 말씀을 배워야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그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이를 전혀 무시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만 초점을 두고 있으니 예수님의 복음이 전혀 그릇 전파되고 있다.

 

막 16:15-20의 말씀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야 한다.
막 16:15-20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 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막 16:15-20의 기록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어야 하는데 전혀 도외시 되고 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는 무슨 뜻인가? 표적과 기사와 이적이 없이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했을 경우에 말씀이 확실히 증거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막 16:15-18에 대한 옥한흠 목사의 주장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표적들이 그대로 나타나야만 참 된 신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방언 하나를 가지고 그 본문의 전부를 다 포함하듯이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일이 그대로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야 된다면 독을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할 것이며 뱀도 마음대로 집을 수 있고 귀신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는 손만 얹어도 나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적을 모두 일으키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떤 이단에서는 성경대로 한번 살아본다고 독을 마셨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 오순절 운동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미국의 오랄 로버츠 목사는 뱀을 집는다는 뜻은 원수를 정복한다는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해석했다. 뱀을 집는 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앞에 나오는 방언이나 귀신을 쫓아 내는 것도 다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 또 하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마가복음 16:15-20이 어떤 사본에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보수주의 학자들 가운데도 이 본문의 권위가 신빙성이 약하기 때문에 성경으로 인정하기를 꺼리는 학자가 여러 명 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새 방언이라는 말을 근거로 하여 방언을 해야만 참 신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옥한흠 목사 편집 ‘현대교회와 성령운동’ p.139-140) 


    만약에 옥한흠 목사의 주장대로 “오순절 계통의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표적들이 그대로 나타나야만 참된 신자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그릇된 것이다. 바른 주장은 막 16:15-20에 기록된 “모든 표적이 오늘날에도 나타나야 한다”라고 말해야지 “이러한 표적이 나타냐야만 참된 신자”라는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다. 옥한흠 목사의 “이런 일이 그대로 믿는 자들에게 일어나야 된다면 독을 마셔도 아무 이상이 없어야 할 것이며 뱀도 마음대로 집을 수 있고 귀신도 쫓아내며 병든 사람에게는 손만 얹어도 나아야 할 것이다”라는 주장은 성경의 기록을 정상적인 자세로 보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으로 그릇된 시각에서 본 것이다.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구절은 옥한흠 목사가 말하는 “어떤 이단에서는 성경대로 한번 살아본다고 독을 마셨다가 죽은 사람이 있다”는 경우와 같이 어떤 신자가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독을 일부러 마시는 경우가 절대로 아니다. 이 기록은 어떤 신자가 무의식 중에 그것이 독약인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잘못하여 우연히 마셨을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또한 옥한흠 목사의 “오순절 운동에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미국의 오랄 로버츠 목사는 뱀을 집는다는 뜻은 원수를 정복한다는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해석했다. 뱀을 집는 것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면 그 앞에 나오는 방언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다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될 것이다”의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다. 오랄 로버츠 목사가 “뱀을 집는다는 뜻은 원수를 정복한다는 것이라고 상징적으로 해석했다”면 이 해석은 전혀 그릇된 해석이다. 성경에 기록된 실례를 들어보자.


행 28:1-6  우리가 구원을 얻은 후에 안즉 그 섬은 멜리데라 하더라.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그 손을 물고 있는지라 토인들이 이 짐승이 그 손에 달림을 보고 서로 말하되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공의가 살지 못하게 하심이로다 하더니 바울이 그 짐승을 불에 떨어버리매 조금도 상함이 없더라. 그가 붓든지 혹 갑자기 엎드러져 죽을 줄로 저희가 기다렸더니 오래 기다려도 그에게 아무 이상이 없음을 보고 돌려 생각하여 말하되 신이라 하더라.

 

    바울이 로마로 가던 중 유라굴로라는 태풍을 만나 그를 태운 배가 파선되어 멜리데라는 섬에 피신하게 되었다. 행 28:1-6의 기록에 토인들이 바울과 함께한 그들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어 비가 오고 날이 춥기 때문에 불을 피워 그들을 영접하였다. 이때 바울이 한 뭇 나무를 거두어 불에 넣으니 나무속에 숨어있던 독사가 뜨거움을 인하여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문 것이다. 그러나 그 독사의 독이 바울을 해치지 못하고 바울은 안전하였다는 기록이다. 막 16:15-20에 기록된 “뱀을 집으며”라는 말씀은 바울의 경우와 같이 나무속에 뱀이 있는 줄 모르고 나무를 집다가 무심코, 우연히 뱀을 집은 것이지 뱀을 의도적으로 집는다고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막 16:15-20에 기록된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을 이상과 같이 해석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해석하는 일은 그릇된 처사이다. 결론적으로 막 16:15-20에 대한 옥한흠 목사의 주장은 성경을 제대로 철저히 연구하지 않고 자의적인 주장을 했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고전 2:1-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현대 교회에서 막 16:15-20과 고전 2:1-5의 말씀이 전혀 이해되지도 않고 있으며, 강조 되지도 않고, 신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있다.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에서 설교자들이 오직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 하느냐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지혜로운 말로서의 유창한 설교의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라고 하였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하였다. 이상의 바울의 간증은 현대교회의 목회자들의 간증이 되어야 하고, 복음전도와 선교사역의 교과서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성령님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유창하고 지혜로운 말만의 설교를 단호히 배격하고 있다.

 

고전 1:17-18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상에서 바울이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지 않는 유창하고 지혜로운 말만의 설교를 단호히 배격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 이유는 바로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에 있다. 유창한 지혜로운 말만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든다는 바울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드려야 한다. 신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현대 교계와 신학계에서 바울을 통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다. 현대의 신학교에서 또는 목회자를 위한 각종 세미나에서 “설교에 관한 강좌”는 있지만 막 16:20, 고전 2:1-5, 고전 1:17-18에 대한 강좌는 일체 없다.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 교계와 신학계에서 지혜로운 유창한 설교만을 통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나 집회를 바른 교회이며 바른 집회이며 유능한 복음사역자라고 인정하고 있는데, 막 16:20, 고전 2:1-5, 고전 1:17-18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올바른 교회가 아니며 올바른 집회가 아니며 올바른 복음사역자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창한 지혜로운 말만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바울은 어떤 성경의 기록을 근거로 하여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인가? 또한 어찌하여 유창한 말의 지혜만의 설교는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말만의 설교는 십자가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가?

 

사 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 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transgressions, 죄)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iniquities)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iniquity)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병)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NIV This was to fulfill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Isaiah: “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

 

    “우리 연약한 것(병)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He took up our infirmities and carried our diseases). 여기의 '연약한 것'은 그릇된 번역이며 바른 번역은 '질병'이어야 한다. 이 기록의 뜻을 이해하면 왜 유창한 말의 지혜만의 설교는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인가의 이유가 밝혀진다. 우리는 통상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원죄와 자범죄를 사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모든 죄를 십자가 앞으로 가져와서 회개하면 반드시 용서함을 받는 것으로 동서양의 모든 신학계와 교계에서 그렇게 알고, 믿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만 아는 것은 사 53:4-6와 마 8:17에 대한 바른 이해는 결코 아니다. 사 53:4-6의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에서 “우리의 질고”란 우리의 질병을 뜻하며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과 슬픔을 당하셨다는 뜻이다. 마 8:17의 “우리 연약한 것(질병)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란 우리의 연약한 질병을 지고 십자가를 짊어지셨다는 뜻이다. 사 53:4-6의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의 질병이 치유 되었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와 죄로 인한 모든 질병을 치유하기 위함이었다는 기록이다. 어찌하여 유창한 말의 지혜만의 설교는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인가? 바로 주님의 십자가는 이 두 가지를 반드시 포함한 십자가 이기 때문에 유창한 말의 설교만 있고, 질병에 대한 치유가 없다면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모든 교회에 세워진 십자가는 오직 우리의 죄의 용서만이 아니라 죄로 인한 질병의 치유를 상징하는 두 가지를 반드시 모두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에 질병의 치유가 없는 교회는 주님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만드는 교회일 뿐이다.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18)는 말씀은 “유창한 설교만으로 전하는 복음전도는 십자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뚯이다. 신유가 없이 말만 가지고 전하는 것은 십자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신유가 없는 목사는 목사가 결코 아니며, 신유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결코 아니다 라는 사실이 증명된다.

 

사도들은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였다.
행 14:3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
롬 15:17-19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 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히 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 하셨느니라.
벧전 1: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상의 기록은 말만 가지고 행하는 오늘날의 복음사역과는 전혀 다른 사역이었다. 행 14:3에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롬 15:17-19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사도들은 오늘날과 같이 지혜로운 유창한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고 성령님의 권능을 통한 신유를 포함한 표적과 기사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