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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와 선교사의 의식주 걱정은 비 성경적이다.
   오늘날 해외 선교사들이 모국에서 선교비를 지원 받는 것에 대하여 성경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바울처럼 신유사역도 없이 자비량 선교를 한다고 하는데 이는 성경적인가?

 

마 10:1-14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 함이니라.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눅 10:1-9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병자를 고쳐주면 그 병자가 그의 집에서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기록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병자를 고치며 마귀를 쫓는 신유의 권능을 주어 복음을 전하게 하시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제자 된 목회자들이 성령세례, 곧 성령님의 권능을 받고, 그 권능을 가지고 신유의 사역, 마귀를 추방하는 사역을 하면 이를 통하여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주님의 종들이 의식주 문제를 해결 못하고 있다는 말은 성령님이 주시는 권능을 받지 않았던지, 받았더라도 교단의 교리 때문에 신유사역을 외면하던지, 일단 받은 신유의 은사를 성령님께서 거두어 가시었던지의 경우이다. 모든 목회자들은 성령세례를 받아 이를 근거로 복음을 전하면 의식주 문제는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신다.

 

신유가 없는 자비량 선교는 전혀 그릇된 것이다.
고전 9:7-12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고전 9:13-14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딤전 5: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딤후 2:4-6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라는 말은 자비량하는 군인은 없다는 뜻이다. 자비량하는 제사장은 없다.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는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복음전도를 통하여 생긴 헌금으로 목회비, 선교비를 해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자비량 선교는 성경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박태수 선교사의 주장
성경은 어떤 선교를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각동 각처로 보내실 때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눅 10:3)고 하셨다. 제자들이 가서 어려움을 당하고 위험한 일을 당할 줄 그분은 이미 아셨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런 환경 속으로 보내셨다. (박태수 선교사, CCC 국제본부 개척선교팀 팀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2008년 4월 2일 LA 크리스찬투데이)

 

    박태수 선교사의 글을 보면 그릇된 점이 발견된다.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각동 각처로 보내실 때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눅 10:3)고 하셨다. 제자들이 가서 어려움을 당하고 위험한 일을 당할 줄 그분은 이미 아셨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그런 환경 속으로 보내셨다”는 주장은 맞는 것 같지만 그릇된 것이다.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는 눅 10:3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눅 10:17-20을 같이 놓고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절대로 그냥 보내시지 아니하셨다.

 

눅 10:17-20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70인 제자들을 각동 각처로 보내실 때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다’(눅 10:3)고 하시면서 실제로 70인 제자들을 보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시어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시어 이를 받아 가지고 나가게 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오순절 전에 받은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는 복음전도의 훈련을 위한 것이었고, 오순절 날 정식으로 이 권세를 받아 복음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박태수 선교사를 위시하여 2006년 말 현재 173개국에 1만 6,616명이 한인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고 있다(자료: 2007년 1월 15일 한국세계선교협의회 대표회장 박종순 목사의 발표, 2007년 1월 17일 LA 크리스찬투데이). 이들 선교사들이 바울의 뒤를 이어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데 이들은 바울이 받은 성령세례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지 극히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계에서 그릇된 고전 12:13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는 모두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경에서 절대로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전혀 그릇된 처사이다.

 

바울은 성령세례를 먼저 받고 선교사역을 시작하였다.
행 9:17-22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 쌔,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이상의 기록에서 분명히 사도 바울은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하여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난 후에 즉시 복음사역에 임했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자비량 선교사들의 경우를 살펴보자. 그들은 그릇 번역된 성경과 그릇된 해석을 통하여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서로 별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세례는 예수님을 믿을 때 모두 받는다”라고 하여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았는데 받았다고 우겨댄다. 따라서 그들의 복음사역, 선교사역은 근본 출발부터 그릇된 것이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성령세례(충만)를 받지 아니했다면 선교사 또는 목회사역자로서의 임명을 받지 않은 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지도 아니하여 선교사의 자격도 없이 선교사라고 하는데 이는 성경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사도 바울은 신약성 경의 최초의 초대 이방선교사였다. 따라서 바울의 바른 호칭은 “사도 바울, 선교사 바울”이어야 한다. 성령세례도 받지 않고 그리하여 신유의 사역도 없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이 바울의 뒤를 이은 선교사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비 성경적인 처사이다. 자비량 선교사였던 바울은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다.


행 19:8-12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롬 15:15-19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더욱 담대히 대강 너희에게 썼노니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이상의 기록을 통하여 바울 사도는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않고 성령님의 권능을 통하여, 신유의 은사를 통하여 복음사역을 했다고 간증하고 있다. 바울이 행했던 이러한 복음사역, 신유사역, 선교사역은 전혀 외면하고 바울의 자비량만을 내세워 바울처럼 자비량 선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비 성경적인 그릇된 처사이다.

 

신유의 은사를 가진 바울은 왜 자비량 선교를 하게 되었는가?
행 18:1-3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행 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살후 3:7-9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함이니라.

 

    이상의 기록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들어 팔면서, 천막장사를 하면서, 자비량 선교, 자비량 전도를 한 것이다. 이 기록에 따라 오늘날의 복음사역에 임하는 사역자들 가운데 바울처럼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서 자비량 선교, 자비량 전도를 한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 만을 보면 오늘날의 자비량 선교와 전도는 성경적으로 바울의 자비량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이 구절들을 잘못 해석한 데서 온 전혀 그릇된 것이다. 이상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 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살전 2:9; 살후 3: 7-9)고 하였다. 바울은 복음전도를 하면서 병자를 치유해주면 그 병자가 주는 헌금을 가지고 천막장사, 자비량 선교를 하지 않고서도 복음사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치유된 병자가 가난하여 사례를 하지 못하는 형편에 있을 경우에 사례를 받는 것은 그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누를 끼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밤과 낮으로 일해서 번 돈으로 복음사역을 하였다.
    오늘날의 자비량 선교사, 목회자들이 사도 바울처럼 성령세례(충만)를 받고, 신유의 은사를 통하여 병 고치는 사역을 하면서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한다면 이는 바울와 같은 자비량의 반열에 있게 되어 칭찬받을 일이다. 그러나 바울이 받는 성령세례(충만)도 받지 아니하고, 바울과 같이 신유의 은사도 없고, 바울과 같이 질병을 고쳐주지도 아니하면서,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하면서, 말만 가지고 선교하면서 바울과 같이 자비량 선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그 근거가 일체 없는 것으로 천부당만부당한 그릇된 비 성경적인 처사이다.

 

바울이 로마로 갈 때 풍랑으로 파선 당한 276명의 양식은 누가 공급해주었는가?
행 28:7-11  이 섬에 제일 높은 사람 보블리오라 하는 이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는지라. 그가 우리를 영접하여 사흘이나 친절히 유숙하게 하더니,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웠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러므로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고, 후한 예로 우리를 대접하고 떠날 때에 우리 쓸 것을 배에 올리더라.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우리가 타고 떠나니 그 배 기호는 디오스구로라.

 

    바울이 로마로 갈 때 풍랑 만나 파선당한 276명을 3개월 동안 먹여주고 재워주고 떠날 때에도 쓸 것을 배에 올리어 주었다고 하였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이렇게 대접을 받게 된 이유는 선교사 바울을 통하여 병 고침을 받은 섬마을 사람들이 후한 예로 대접했기 때문이었다.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은 모국에서 선교비를 지원받지 않았다.
행 11:25-30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오늘날 국내와 국외의 선교사역에 있어서 선교비의 지원이 없이는 선교를 못하고 있는데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바울은 오히려 선교지에서 모은 선교비를 모국 교회가 있는 이스라엘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령세례 곧 성령님의 권능을 받은 선교사를 통하여 신유의 역사가 이루어짐으로 현지 주민들이 자진해서 드린 헌금을 통하여 선교사들의 의식주와 선교비를 충당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반드시 사도들과 같이 신유의 사역을 통하여 선교비를 자체 해결해야 할 것이다. 성령세례, 성령님의 권능을 받지 않은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은 반드시 이것을 먼저 받고 사도들처럼 목회사역, 선교사역에 임해야 한다. 
    왕하 5:1-18에 기록된 이방나라의 나아만 장군은 그의 문둥병을 고치기 위하여 이스라 엘의 선지자 엘리사에게 사례비로 금과 은을 가지고 왔는데 이를 오늘날의 액수로 환산하면 대략 30억원에 해당한다. 오늘날에도 성령님의 권능, 신유를 통하여 병자를 치료해주면 의식주와 선교비의 문제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곳이든지 가난한 나라, 가난한 도시, 가난한 동네에도 질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중에는 물질적으로 부요한 부자들이 반드시 끼여 있다. 이와 같은 부요한 병자들이 있음으로 그 병자를 고쳐주면 그 집에서 먹여주고 재워주며 필요하면 옷도 주어 의식주가 해결된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그들의 친척과 친지의 질병도 고쳐달라고 하여 교통편을 제공하며 교통비를 줌으로 선교비가 자동적으로 해결되므로 모국 교회에서 선교 비를 지급 받을 필요가 일체 없게 된다. 베드로와 바울을 위시하여 사도들과 제자들이 선교비를 예루살렘교회에서 받아 가지고 외국에 나아가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은 한 구절도 없다. 예수님의 제자이며 종이라고 하며 베드로와 바울의 복음전도의 사역을 이어받아 그들과 같은 복음사역과 선교사역을 행한다고 하는 오늘날의 선교사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복음이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며 예수님과 제자들이 받은 성령세례도 받지 않아 성령님의 권능도 없고 신유의 은사도 없이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니 선교비를 반드시 받아야 하고 또한 반드시 주어야 선교를 하게끔 되어 있다. 복음이란 말의 뜻도 모르며 성령세례도 받지 않는 이들이 해외에 나가서 신학교를 세워 복음을 전한다고 하여 거창하게 선교보고대회를 갖는데 이는 성경에 없는 것으로 전혀 비 성경적인 처사이다. 많은 선교사들과 복음사역자들이 “바울도 천막장사를 하면서 자비량의 선교를 했으니 나도 그렇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그릇된 해석에서 온 것이다. 바울이 말한 자비량의 선교의 뜻도 모르면서, 신유사역 도 없이 자비량 선교를 한다는 것은 황당한 것으로 전혀 비 성경인 처사이다. 
    중동지방은 이슬람권이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 이슬람의 나라 이락에 가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용조 목사 교회에서 파송되어 피살당한 김선일 씨가 있다. 회교권에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는 최바울 선교사(인터쿱)가 있다. 하용조 목사와 그는 복음과 선교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고, 성령세례라는 것도 모르며, 성령세례를 받지도 않고 한국에 있는 많은 평신도들에게 선교사라는 직함을 주어 선교사로 보내고 있다. 이는 마치 맨 주먹만 가진 비무장의 군인들을 중무장한 적군이 있는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전혀 동일한 처사이다.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 본 마 10:1-13의 기록대로 신유사역을 통하여 전도하고 선교하면 ‘이락’이건 ‘이란’이건 상관없이 선교사들을 받아드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있는 고관들과 부자들의 불치병을 고쳐주는데 그들이 보호해주지 않을리 없기 때문이다.
    일례를 하나들어 보자. 미국 로스안젤레스에 있는 미주복음방송(2004년 10월 4일)의 원종수 의사(방언도 한다고 했음)의 간증에 의하면, 태국의 오지에 단기 선교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기독교 선교사가 오면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선교팀 일행이 가기 하루 전에 그곳의 추장이 심한 병에 걸렸기에 가서 치료해 주었고 치과의사도 많은 사람들을 고쳐주었다. 그 동네 사람들은 총 180명인데 그들은 치료해 줌으로 이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추장은 자기 소유의 땅을 무료로 주면서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겠으니 교회를 세우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선교사들이 외국에 나가서 신유사역을 할 경우에 어느 곳에서든지 환영을 받는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실례이다. 세상의 의사가 아니라 성령님에 의한 신유의 역사가 이루어질 경우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당장에 보여줌으로 불교를 믿는 그들이 불교를 버리고 예수님을 믿을 것임이 확실하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바울은 이렇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에 말만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면 불태워 죽이겠다고 하며, 실제로 죽임을 당하고 있다. 바울과 베드로와 같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서 인위적인 방법으로 순교정신을 주입하고 고취시켜 불신의 나라에 선교사로 보내는 것은 성경에서 절대로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을 통해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생기는 순교정신은 인간적이며 인위적인 방법으로 주입되고 최면 된 순교정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에스겔 34장에 기록된 목자와 양의 관계를 해석하면 목자의 의식주의와 선교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목자가 양의 무리를 잘 돌보아주면 목자의 장되시는 예수님께서 그 목자의 의식주는 반드시 책임을 지고 해결해주신다. 왜냐하면 목자가 치는 양무리는 목자의 것이 아니고 목자장되시는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주시는 신유 의 은사를 받아 병든 양 무리를 치유해주면 병든 양 무리가 병원에 가져다줄 병원비를 목자나 선교사들에게 주어 목자의 의식주와 선교비, 교통비를 반드시 해결받게 된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복음전도와 선교의 방법이다.